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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어린이날
leed2017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를 지키고 있던 어느해 5월 5일 어린이날이었다. 초등학교 1, 2학년이 될까 말까 한 어린아이들 2, 30명이 자기들을 데리고 간 교사와 함께 청와대를 방문한 것을 텔레비전으로 본 적이 있다.


 널찍한 잔디밭에 꼬마 방문객들이 빙 둘러앉고 대통령께서 청와대를 방문한 어린이들을 환영하는 그런 자리였다. 대통령께서 자리에 앉자 데라고 간 교사는 꼬마들을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통령 할아버지한테 인사드려야지요."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꼬마 손님들은 일제히 꾀꼬리 같은 목청을 높여, "대톤년 하라버지, 안년하제요"를 외치는 것이었다. 오기 전 연습을 수십번 한 모양이었다. 마치 어느 사극(史劇)에서 만조백관들이 임금 앞에 엎드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를 동시에 외치는 장면과 비슷하다고 할까.


 이어서 대통령 할아버지께서 그 자리에 온 꼬마들에게 한말씀 해달라는 사회자의 조심스러운 요청이 있었다. 자세한 어휘는 잊어버렸으나 대통령 할아버지는, "여러분, . 자신과 희망, 용기와 '야망'을 가지고. " 힘찬 나날을 살아가라는 말로 인사에 대신하였다. 대선을 앞둔 어느 야당의 전당대회에서 한판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수준 높은 북소리였다. 이렇게 용기와 자신감은 어릴 때부터 배워야 하느니라.


 지난 98년 봄 5월 5일 어린이날에도 청와대 잔디밭에서 또 다른 대통령 할아버지 앞에서 비슷한 숫자의 어린이들이 모인 것을 본 적이 있다. '국민과 대화'를 즐기는 대통령께서는 어린이들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했다. 그때 한 어린이가 "학교에서 과제가 너무 많은데 할아버지께서 어떻게 좀 줄여줄 수 있느냐"는 질문을 했다. 관계 당국의 검열을 거쳤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천진난만한 질문에 우리의 준비된 대통령께서는 "숙제가 '과중(過重)' 하면 줄여야 한다"는 요지의 대답을 했다.


 '야망'이란 말과 '과중'이란 말 중에 어느 것이 어린이들에게 더 어려운 말인지는 국어학자가 아닌 나로서는 선뜻 판가름이 나질 않는다. 그러나 이 두 유식한 단어 모두가 매월당(梅月堂) 김시습 같은 신동이 아니고서는 초등학교 1, 2학년 수준에서 그 말뜻을 이해하기는 무척 어려운 말인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돌아가신 어머님께서 생전에 즐겨 들려 주시던 다음과 같은 우스갯소리가 생각난다. 즉 옛날 어느 시골에 선비가 하나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대낮에 호랑이가 와서 그의 어린아이를 물고 산으로 달아났다. 놀란 선비는 "사람 살려요. " 하는 고함 대신에 선비로서의 학식과 풍모를 지키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유식한 문자를 써서 상황의 긴박함을 알렸다. 


 "원산대호(遠山大虎)가 근산래(近山來) 하야, 가아(家兒)를 생포거(生捕去)하니, 오호통재(嗚呼痛哉)로다! 지봉자(持捧者)는 지봉(持捧)하고 지부자(持斧者)는 지부(持斧)하여 속래(速來)하라." 


 우리말로 옮기면 "먼 산에 호랑이가 가까운 산에 와서 우리 아이놈을 산 채로 물어갔으니 아아 슬프도다, 몽둥이를 가진 사람은 몽둥이를, 도끼를 가진 사람은 도끼를 들고 어서 빨리 나오라." 


 문자 투성이의 고상하기 짝이 없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농민들이 우물쭈물하는 동안에 호랑이는 아이를 물고 뒷산으로 가서 냠냠 해버렸다는 것이다. 이 어이없는 이야기가 고을 원님의 귀에 들어갔다. 화가 난 원님은 당장 선비를 잡아다가 볼기를 때리게 하며 꾸짖었다. 


 "이놈, 네가 유식하면 얼마나 유식하다고 사람이 호랑이한테 물려가는 판에 무슨 문자냐, 미련한 놈. " 아픔을 이기지 못한 선비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다음과 같이 외쳤다. 


 "아지둔(我之臀)아, 차후(此後) 절대불용문자(絶對不用文字)로다."(아야야, 내 궁둥이야, 다음부터는 절대로 문자를 쓰지 않겠노라)


 이렇게 "소귀에 경 읽기" 식의 어려운 말을 쓰는 것은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자기도 모르게 저지를 수 있는 일이다. 과거의 자기 경험이나 버릇이란 지금의 버릇이나 행동에 이처럼 크나큰 영향을 주는 것이다.


 한국에서 한때 유행했던 '정의 사회 구현'이니 '세계로 향한 한국인' 같은 화려한 구호들도 많은 사람에게 '야망'과 '과중'이나 '원산대호'에 지나지 않는 빈말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199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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