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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고 세월 가면
leed2017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안동군 예안면 면 소재지에 있는, 그 당시 불리던 이름은 예안국민학교였다. 뒤로는 산꼭대기에서 돌을 던지면 학교 지붕 위에 떨어질 것 같은 가파른 선성산(宣城山)이 버티고 있고, 학교 정문 앞에서 2분만 걸어가면 둑을 따라 낙동강이 유유히 흐른다. 여름이면 뒷산에서 울어대는 매미 소리가 교실을 시끄럽게 하고, 가을이면 뒷산 나뭇잎이 교실 뒷벽에 쌓인다. 한 학년에 두 학급밖에 없는 이 작은 학교에서 우리는 6년 동안 머리를 맞대고 책 읽고, 노래 부르고, 싸움박질하고, 공차며 뛰어놀았다.


 집에서 학교에 가자면 가을 건너 들판을 지나 늘매마을 뒤로 청현(靑峴)이라는 작은 고개를 넘고 또 신작로를 따라 20여 분 걸어야 했다. 청고개 마루에 올라서며 도산서원이 보이고 오른쪽 멀리 청량산이 보였다. "청량산 육륙봉을 아는 이 나와 백구/백구야 헌사하랴 못 얻을 손 도화로다/도화야 떠지지 마라 어주자 알까 하노라" 하는 퇴계 선생의 노래에 나오는 그 유명한 산이다. 봄, 여름으로 날씨가 좋은 날은 고갯마루 잔디에 누워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보고 혼자서 노래를 부르곤 했다. 아직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없었던 어린 나이였으니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는 것도 산골 아이에게는 하나의 구경거리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는 고향 집에서 50리 떨어진 안동으로, 안동에서 대구로, 대구에서 다시 서울로 옮겨가면서 학교에 다녔다. 아내를 만난 것도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 덕분이다. 1966년 9월 12일, 나는 공부를 더 할 꿈을 안고 김포공항을 떠났다. 떠나기 바로 전날 을지로 입구 어느 양식집에서 조촐한 약혼식을 가졌고, 식이 끝나고 근처 어느 사진관에 가서 기념사진도 찍었다. 지금도 침실 벽에 걸려 있는 38년이 넘는 그 흑백사진을 들여다 보면 활짝 핀 우리들의 젊은 날 위에 지나간 세월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비행기 트랩을 오르던 날 주머니 속 깊숙이 넣어둔 미화 60불이 나의 전 재산이었다. 법으로 허용되는 미화 200불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이렇게 유학을 간답시고 한국을 떠나는 나를 부러워할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작 미화 60불을 가지고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이 나를 여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학위가 끝난 1970년 캐나다 서부 어느 조그마한 산골 대학에서 교편을 잡다가 3년 후에 스스로 사표를 던지고 연구를 한답시고 미국 메사츄 대학으로 갔다. 그리고는 주인 잃은 사무라이처럼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다가 1977년 7월부터 토론토와 미국 디트로이트 중간지점에 있는 웨스턴온타리오 대학교에 가게 되었다. 그 대학이 내가 한국에 오기 전까지 22년간 내 발목을 잡고 있던 대학이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 대학에 있는 22년 동안은 가르치는 재미나 보람보다는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투쟁의 연속이었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1999년 8월 6일, 나는 이화여자대학교와 인연을 맺게 되어 33년의 바다 밖 생활을 청산하고 26살의 청춘으로 떠났던 그 김포공항에 60살의 노인이 되어 돌아왔다. 웨스턴온타리오 대학교에서 5년을 보내는 것이 이화여자대학교에서 1년을 보내는 것과 맞먹는다는 생각이 들만큼 하루하루가 재미있게 휘딱휘딱 지나갔다. 


 군자(君子)는 몸은 바빠도 마음은 여유로와야 한다는데 나는 군자도 아니면서 마음에 생기가 돌고 자신감이 생겼다. 바빠도 재미가 있었다. 캐나다와는 달리 매일 아침 책가방을 들고 문을 나서는 기분은 마치 소풍길에 나서는 초등학교 학생처럼 가벼웠다. 저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어쩌면 학생들이 그렇게 귀여울까. 모두들 꽃망울처럼 귀여운 무공해 소녀들. 하나같이 명민하고 발랄한 학생들을 대할 때면 "이런 젊은이들과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내가 참 복이 많은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눈맑은 소녀들을 앞에 두고 내가 게으름을 피우면 무슨 큰 죄라도 저지른 것같이 생각된 때도 있다.


 여기서는 캐나다에서처럼 느닷없이 기어오르거나 깐죽거리는 놈도 없다. 시험점수를 잘못 받았다고 불만에 찬 놈도 막상 찾아와서는 "죄송합니다," "선생님 정말 죄송해요?" 하는 말만 되풀이한다. 깐죽깐죽 따지는 서양과 아직도 사부일체(師父一體 : 스승은 부모와 같다)의 정신적 유산이 남은 동양의 차이를 눈으로 보는 것 같았다. 교수와 학생 간에 평등을 부르짖던 내가 이처럼 "선생님" "선생님" 하며 떠받드는 것을 좋아할 줄은 나 자신도 미처 몰랐다. 이걸 두고 대접받고 산다고 하던가? 한국 교육의 천정이 무너졌네, 어쩌니 해도 한국이 아직은 선생 해먹기에는 천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999년 9월 학기부터 시작한 이화대학에 꼭 2학기만 지나면 물러갈 때가 된다. 2학기라면 햇수로는 만 1년이지만 이 1년은 먼동 터오듯 빨리 다가올 것이다. 캐나다에 있을 때는 한국에 가면 매주말이면 고향을 다녀올 줄 생각했는데 시간이 바빠 일년에 한두번이 고작이었으니 가보질 못하기는 여기 있으나 거기 있으나 다름이 없다.


 지금은 수몰지구가 되어 아침저녁 학교를 다니던 예안읍으로 가는 신작로 길은 열길 물 속에 잠겨 버렸다. 고향마을도 "여기가 거기였던가?" 하고 짐작도 어려울 정도로 변해 버렸다. 청고개도 오르내리던 사람 발길이 끊어지고 고개 위로는 자동차 길이 나 있다. 적막강산. , 찾아오는 사람 없는 이 고개에 봄이 오면 들꽃들이 피었다 진다. 청고개 마루에서 우리 집으로 내려가는 길은 이름 모르는 나무와 잡초가 어울려 마치 비무장지대 같은 폐허를 이루고 있다.


 멀리 청량산(淸?山)에서 흘러나온 내 영혼의 핏줄이 잠시 쉬었다 가는 청고개. , 그러나 내 마음속에 간직된 고개는 오늘의 청고개가 아니라 50년 전, 사람 지나가는 소리 들리고, 꽃피고 새 울던 그 옛 고개이다. 


 꽃 피면 세월 가는 것, 하늘에 떠가는 구름도 갈 길이 다하면 내려앉을 땅이 있다는데 행려병(行旅病) 환자도 아닌 나는 세월에 밀려 또 어디로 갈 것인가. (200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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