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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팍한 민주주의
leed2017

 

 2015년 3월에는 토론토 한인사회에서 한인회장 선거가 있었다. 회장 후보는 두 사람. 한 사람은 소위 말하는 1.5세대로 어려서 부모를 따라 캐나다에 이민을 와서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마치고 자기 전공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40대 L 씨. 또 한 사람은 이민 1세로 한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직장에서 일을 하다가 이민을 온 60대 사업가 C씨였다.


 선거 사무소에서는 지지하는 후보자에게 한 표를 던지려면 자기가 한인사회의 멤버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니 선거 날 반드시 본인 사진이 들어 있는 신분증, 한국 같으면 주민등록증을 꼭 가지고 와야 한다는 알림 광고를 신문에 실었다. 


 선거에 참여할 유권자들은 미리 등록을 마친 상태. 이 상황에서 선거날이 가까워져 오고 선거 운동이 점점 뜨겁게 되자 선거관리위원회에서는 투표할 사람은 한국 여권이나 캐나다 여권을 투표장에서 내보여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그러나 이 의견은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아 곧바로 취소되고 말았다.


 투표장에 여권을 가지고 오라는 신문 기사를 처음 보는 순간, "참, 할 일 없는 사람들도 많구나. 한인회장 하나 뽑는데 여권이 왜 필요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그럴 듯한 말로 포장을 한다고 해도 투표를 할 때 여권까지 내보여야 한다는 것은 사람을 못 믿기 때문에 생긴 요구에 지나지 않는다.


 이 작은 한인사회, 고국의 독재를 걱정하며 어떤 압력, 어떤 간섭도 받지 않으며 우리끼리 다정하게 살아 보자는 한인사회에서 한인회장 선거에 여권까지 내보이라는 것은 "당신을 못 믿겠다."는 생각 말고 또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우리는 민주주의가 성행하는 캐나다 같은 나라에 사는 것을 큰 행운으로 생각한다. 이 위에 우리 스스로도 민주사상에 축축이 젖어 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헤겔(Hegel) 말마따나 인간은 필연적으로 모순을 내포하고 있어서 이 두 가지가 조화.통일되어 가는 것이 현실이요, 사고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 우리 마음에는 자유와 민주사상에 대한 갈망이 있는 반면 그 반대 사상, 즉 독재에 대한 욕망도 가시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오가는 대화에 귀를 기울여 보면, "한국같이 시끄럽고 말 많고 혼탁한 사회는 이대로 가면 안 되니, 박정희 같은 사람이 나와서 확 쓸어버리고 잡아갈 놈 잡아가고 풀어 줄 놈 풀어줘서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을 듣는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사회에서 말썽 부리는 사람은 모두 잡아 가두고 위에서 내려오는 모든 결정을 충성스럽게 실천만 하면 좋은 시민으로 보는 것이 전체주의 사회가 아닌가. 우리가 오늘날 이처럼 시끄럽고 질서가 없는 것도 독재적 위정자 밑에서 살다가 그 독재가 물러가고 민주정권이 들어서면 필연 시끄럽고, 말 많고, 질서가 없는 사회가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홧김에 내뱉는 말 같다. 처음부터 말이 없고 모든 일에 질서가 잡힌 민주주의는 없다.


 한인회장 한 사람 뽑는데 건강 카드나 운전면허증 말고도 여권까지 보여 달라는 것도 알고 보면 '믿을 놈 하나 없다.'는 마음속에 숨겨 둔 생각이 일사불란의 질서를 요구하는 독재체제의 생활 경험과 맞물려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끼리 모여 사는 한인사회 멤버들도 이렇게 못 믿으면서 본국의 어지럽고 위선이 날뛰는 정치 풍토를 걱정한다. 천 번은 더 들었을 성경 말씀, "남의 눈에 든 티끌은 보여도 네 눈에 든 들보는 보지 못하느냐?"는 말은 이 경우를 위해서 나온 말인 것 같다.


 여권을 보여줘야 한다는 계획이 취소되었으니 다행이다. 애당초 이런 생각이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히 부끄러운 일이다. 이러다가는 앞으로 여권에다가 호적등본 1통씩 준비하라는 말이 나올까 걱정이다. (201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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