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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흘리며
leed2017

 
 남의 일에 울어 본 적이 있는가. 젊었을 때는 영화를 볼 때나 슬픈 장면을 보면 나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고이곤 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부터는 감정이 메말라져서 그런가, 눈물이 고이는 횟수가 많이 줄어들었다.


 내 나이 인생 중반을 벗어날 무렵, 남의 일을 보고 내 눈물샘 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하루종일 눈물을 달고 산 적이 있다. 이야기는 이렇다. 벌써 30년은 넘었지 싶다. 캐나다 대학의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대구에 있는 D대학에 가서 집중 강의를 하고 오던 때였다. 어느 해 늦은 봄이었다. 정부의 남북화해 정책의 하나로 이산가족 상봉이 있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서 그 난리 중에 서로 헤어진 후, 생사를 모르고 꿈에나 그리워하던 가족들이 다시 만나는 장면을 연일 텔레비전에서 생방송으로 쏟아내고 있었다. 감동적이라기보다는 처절하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말인 것 같았다. 나는 텔레비전 앞에서 커피를 마시다가도 울고, 밥을 먹다가도 울고, 식구들과 한담을 하다가도 울고, 전화를 받다가도 울고, 울고, 울고, 또 울고, .


 거기에는 아무런 체면이나 부끄러움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렇게 공개적으로 울어 본 것은 내 평생에 처음이었고 앞으로도 없지 싶은 생각이 든다. 물론 내 경우 이북에 계신 형님과 장인어른이 생각나서 더 뜨거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니 순전히 남의 일을 보고 울었다 하기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지만.


 시인 C는 눈물을 인생의 지하수, 인생의 값어치는 눈물의 무게라고 했다. 헤어진 지 30년, 남과 북으로 떨어져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조차 듣지 못하고 살던 가족이 서로 만나 아버지, 어머니, 형님, 누나를 부르며 어린아이처럼 엉엉 소리내어 우는 장면을 보고 눈물 한 방울도 떨구지 않는다면 그 사람 정서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나는 이런 사람들에게는 주저 없이 '정서적 변비증' 환자라는 딱지[label]를 붙이고 싶다.


 눈물의 전제 조건은 공감이다. 공감이란 무엇인가? '가슴에 와 닿는다'라거나 '나도 마음이 슬퍼(기뻐)지더라'는 생각이 들면 공감이 형성된 것이다. 그러니 공감 능력이 많고 적음은 그 사람 마음의 온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자기와 가까운 사람이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 심리적 동요를 더 크게 받는 것은 공감 때문이다.


 공감 능력에는 개인차가 크다. 예수나 석가, 수녀 테레사(Theresa) 같은 성인들은 생판 모르는 사람이 곤경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고 자기 일인 것처럼 눈물 흘리고 가슴 아파한다. 한마디로 '너'와 '나' 사이에 경계선이 없다는 말이다.


 언젠가 우리가 사는 콘도미니엄 아래층에 사는 H형네서 빌려온 KBS의 '가요무대'를 눈물을 글썽이며 본 적이 있다. 이 '가요무대'는 1960년 중반에 독일로 간 간호사와 광부들을 위문하기 위해서 KBS가 독일에서 녹화한 것. 청중 대부분이 꽃피는 청춘 20대에 독일에 가서 어영부영 바쁘게 살다 보니 어느새 50년 세월이 구름 저쪽으로 가버리고 7, 80대 늙은이가 된 것이다.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도 이 감격스러운 청중들 앞에서 그야말로 젖 먹던 힘을 다해 열창을 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보통 노래를 부를 때 좋은 인상을 남기려고 얼굴에 배시시 꾸며내는 모나리자의 묘한 웃음은 말끔히 가시고 울먹이는 표정으로 진지하게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니 나도 눈물이 났다. 20대 찔레 순 청춘에 독일에 가서 어느덧 백발의 늙은이가 된 청중들이나, 태평양을 날아 캐나다 땅에 와서 칠십 중반의 늙은이가 된 내 신세와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다.


 나는 청춘의 막을 내린 지가 오래다. 이제 내게는 폭풍우 몰아치던 청춘 시절도, 이름 있는 학자를 꿈꾸던 중년 시절도 지나갔다. 이제는 웃을 일이고 울 일도 그다지 많지는 않을 것이다.

 


. 우는 것은 반드시 까닭이 있는 법
나그네 심정 놀라게 하네
나그네 심정 또한 같은지라
그 울음 나는 시(詩)로 쓰네
(所鳴果有事 …. 其鳴以詩成)

 


 예순 셋 나이에 추사(秋史) 김정희와 친하다는 이유 하나로 임자도에 유배를 간 조선 후기의 화가 우봉(又峰) 조희룡의 눈물이다. 우봉 말이 맞다. 우는 데는 무슨 이유든 반드시 이유가 있는 법. 이유는 대부분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고픈 억울한 사연일 것이다. 


 남과 북으로 갈라져 부모 형제를 그리워하는 것도 억울한 사연이요 청춘에 독일로, 캐나다로 와서 백발이 다 될 때까지 뭉그적거린 것도 알고 보면 억울한 사연이다. 그러나 그 억울한 사연의 이유를 들자면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쳐본 죄밖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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