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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情)
leed2017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님아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나네
아무렴 그렇지 그렇구 말구
한 오백 년 사자는데 웬 성화요


- <아리랑>의 한 구절

 

 

 정(情)이란 무엇인가. 꼬집어 정의 내리기는 무척 어렵다. 영어에는 우리의 정과 딱 맞아떨어지는 말은 없는 것으로 안다. 마치 대학의 chancellor라는 말이 우리나라 대학에는 꼭 들어맞는 자리가 없는 것처럼-. 친절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리키는 affection(애착)이란 단어가 가장 가까운 말이 아닐까. 정 밑에 사랑이 깔려 있을 때가 많지만 꼭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미운 정이라는 말까지 있는 것을 보면 사랑이 정을 배양하는 데 필요충분조건은 아닌 것 같다.


 "정 각각, 흉 각각"이라는 속담이 있듯이 어떤 사람에게 쏠리는 정과 그 사람의 결점과는 다른 것이어서 정이 쏠린다고 해서 흉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며 흉이 있다고 해서 정이 가시는 것도 아니다. 정과 뗄 수 없는 말로 한(恨)이라는 게 있다. 그러나 이것도 무엇인지 꼬집어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다. 나는 사랑이란 말처럼 무엇이 정이고 무엇이 한인지는 모든 사람이 말로는 표현하기가 어렵지만, 가슴 속으로 느끼기는 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동양문화 특히 한국문화는 정과 한의 문화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정도로 정에 찌들고 한에 저리어 왔다. "뒤주에 쌀 떨어지고는 살아도 가슴에 정 떨어지고는 못 산다."라거나 "돈 떼먹고 살아도 정 떼먹고는 못 산다." 같은 말들이 이를 잘 나타낸다. 


 몇 년 전 한국의 원로 수필가 김시헌 선생이 내게 첫 마디가 "花香千里 情香萬里-꽃의 향기는 천리를 가고 정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로 시작되는 엽서 한장을 보내왔다. 정이 뭐길래 우리 문학이나 예술작품을 보면 어느 모퉁이에서나 쉽게 정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예로, 김연갑의 <아리랑>을 보면 50종에 2,000여 수(首)의 노랫말 거의 절반이 정(情) 아니면 한(恨)에 매달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계월향이나 안숙선, 임방울, 강도근 같은 명창들이 전통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어보면 우리의 정은 눈물샘에 연결되었는가, 듣는 사람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고인다.


 그런데 얼마 전에 예술가곡을 부르는 가객들이 무대에서 우리의 전통 민요, 이를테면 <한 오백 년>이나 <신고산 타령>, <정선 아라리> 같은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실망스럽게도 그들의 노래에는 정이나 한을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 전통민요에는 피맺힌 한이 필수적이다. 어떤 예술가곡 가수들은 웃는 얼굴로 우렁차고 활기에 찬 목소리로 부르기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있는 것 같아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돌아오라 소렌토로>를 부를 때와 <한 오백 년>을 부를 때 무대에 선 가수에게 요구되는 음악적 요구는 다르다. 그러나 이들은 목소리만 우렁차고 활기있게만 하면 되는 줄 아는 것 같다. 어떤 때는 그 좋은 노래를 너무나 격에 안 맞게 불러서 분노가 치밀어 전통 노래 훼손(毁損)죄로 고소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든다.


 일반적으로 기운차고 씩씩한 기상은 정과는 거리가 멀다. 군가(軍歌)도 아닌데 왜 그렇게 용감무쌍하게 고함만 질러대는지! 캐리비안 연안을 떠다니는 호화 유람선보다는 손으로 저어 가는 나룻배가 더 정겨운 것처럼 정이 깃드는 데는 굵고 튼튼한 것보다는 가냘프고 연약한 것, 화려하기보다는 애잔한 기쁨이나 슬픔이 서려 있는 것이 더 좋다. 한낮의 강렬한 햇빛보다는 은은한 봄밤의 달빛이 더 정겹고, 확성기를 통해 나오는 우렁찬 웅변보다는 둘이서 들길을 걸으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정경이 더 정겹게 느껴지지 않는가.


 한국화를 보면 정(情)의 실체가 확연히 드러날 때가 있다. 한국에서 정감이 있다고 칭찬받는 그림은 웅장하고 비상(飛翔)하는 그런 그림이 아니라 혜원(蕙園) 신윤복의 그림처럼 냇가에서 정답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빨래를 하는 가녀린 여인들의 모습을 담은 그림일 것이다.


 서양과 동양의 가장 큰 차이점을 들라면 나는 주저 없이 정(情)과 한(恨)의 있고 없음을 들겠다. 서양사람들은 우리에 비해서 정이 없다고 할까 매정하다. 수십 년을 같이 근무하던 동료 교수가 은퇴하고 직장에서 더는 보이지 않을 때 남은 교수들이 가고 없는 그 교수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횟수는 한국의 반의 반도 안 될 것이다. 그야말로 Out of sight, out of mind(보이지 않으면 그만이다), 우리네와는 퍽 대조적이다.


 몇십 년 만에 우연히 서로 만나서도 점심 한 번 같이 하자는 말도 꺼내지 않는 사람들-. 이렇게 정이 없는 사람들과 50년 가까이 부대끼다 보니 나도 모르게 매정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흉보면서 닮는다던가.


 생각의 서구화가 되자면 정부터 과감하게 처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충고해준 대선배의 말이 생각난다. 그러나 나는 말로는 정 따위야 벌써 옛날에 떨쳐 버렸다고 큰소리치지만, 마음은 아직 정의 포로가 되어 산다. 정의 울안에서 사는 사람을 만나면 더없이 반갑고 이야기가 많다. 그러나 한국엘 가면 '서양놈 다 되었구나'하는 표정들이 역력하다. 여기 오면 저기가, 저기 가면 여기가 낯설게 보인다. (201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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