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 오늘 방문자 수: 9 전체: 389,026 )
늦가을의 여수(旅愁)
leed2017

 


돌아도 보지를 않고 또 한 해가 가는구나
여든 다섯 해 늙은 종지기 혼자 두고 가는구나
옛날엔 푸른 종 울리며 내가 너를 보냈는데

묻지 말자 오가는 일 맞고 또 보내는 일
흐르는 시냇물 자락에 우선 잠시 손 담글 뿐
머물고 떠나는 이야기 저 강물에 묻지 말자

 

 

 

 서울에 사는 대학 동기동창의 부인 H여사가 보내 준 800쪽이 넘는 백수(白水) <정완영 시조 전집>에서 옮겨 온 시조다. 이 시조 전집은 내가 지금까지 모두 열 번은 넘게 읽었지 싶다.


 오늘같이 한 해가 저물어 가는 날에는 백수의 코스모스처럼 가련하고 눈물자국 배인 시어(詩語)들이 안성맞춤이다. 이 나이에 "해를 보내는 것이 즐겁고 희망에 찬 새해가 온다."고 좋아할 사람이 하나라도 있을까. 


 백수는 경상북도 김천 태생-. 서울역에서 부산행 기차를 타고 중간쯤 되는 거리 대전을 지나며 커피 한잔을 마시고 나면 기차는 어느새 추풍령 터널을 빠져나와 김천역에 도착한다. 그는 지금 서울에 살지만 오매불망 그의 고향 김천 황악산의 솔바람을 잊지 못한다. 그의 아호 백수(白水)도 고향 김천(金泉)의 천(泉)자를 파자한 것이요, 그의 시실(詩室) 이름도 '망황악시실(望黃嶽詩室)'이다.


 알고 보면 새해니 헌해니 하는 구별도 애당초 없는 것. 오늘 이 새해의 시작일 수도 있고 내일, 모레가 해의 끝이랄 수도, 혹은 묵은 해랄 수도 있다. 어느 사이에 우리는 한 해의 중턱을 훌쩍 뛰어넘어 늦가을의 끝자락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가을이면 문득문득 생각나는 게 하나 있다. 청전(靑田) 이상범의 동양화다. 대학 시절, 경복궁 신무문 근처 국전(國展)이 열리는데 가서 동양화 전시실에 들어서면 고희동, 노수현, 허백련, 배염, 서세욱 같은 동양화로 일세를 풍미하던 거장들의 산수화를 감상하던 생각이 난다. 그들 가운데 청전은 내가 국전 나들이를 할 때마다 늦가을의 풍경-, 이를테면 다 쓰러져 가는 낡은 기와집 한 채가 멀리 보이고, 잎 진 산에 노인 하나가 지게에 나무를 잔뜩 지고 고적한 산길을 힘겹게 올라가는 그런 만추(晩秋)의 풍경을 화폭에 담아 보여 주었다.


 이제는 지게를 진 사람이 눈에 띄던 세월도 갔고, 그런 그림을 그리던 화가들도 저 세상 사람이 된 지 오래, 화풍(?風)도 옛날과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오늘도 아내와 함께 청전 산수화에 나올법한 가을 언덕을 오르내리다가 돌아왔다. 


 이제는 아내의 손을 잡아도 연애 시절과는 다르다. 전신으로 '찌르르'에서 '무감각'까지 오는 데 50년도 채 안 걸린 셈. 하기야 결혼해서 아이 둘까지 낳은 여자가 아직도 남편 손을 잡을 때 '찌르르'를 느낀다면 이는 불초 남편의 목숨을 단축시키는 암(癌)보다도 더 무서운 병이 아니겠는가.


 부부란 육욕적인 애정에서 출발, 정(情)으로 옮겨 가서 낙(樂)으로 끝나는 것. 그래도 7, 80나이에 새 장가를 가는 사람들이 가끔 눈에 띈다. '용기 있는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주책스러운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앞선다. "인생은 70부터"라는 말은 이들의 말이지 싶다.


 가을 다음은 겨울. 캐나다 같은 북국(北國)에서는 1,2월이 가장 혹독한 추위가 오기 때문에 11,12월은 내게는 늦가을이다. 그러니 일 년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아니라 겨울, 봄, 여름, 가을 순서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한 해를 보내며 스스로 '올해는 퍽 알차게 보냈구나.'는 결론을 내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런 생각은 '올해는 부모님께 효도를 무척 많이 했구나.'는 생각과 마찬가지로 대단히 용렬한 생각이다. '어영부영하다 보니 해놓은 일도 별로 없는데 벌써 한해가 저무는구나.'와 같은 세월의 무정함과 세상살이의 번거로움에 한 줌의 가녀린 탄식이 마땅치 않을까.

 

 


꽃씨가 묻힌 자릴 모른 채 밟고 가듯
꽃이 펴야 봄이라고 외쳐대며 살아가듯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살아가는 것이다

 

 

 아내의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 따라갔다가 만난 K목사가 내게 주고 간 문예지 <시조생활>을 뒤적이다가 우연히 김귀례의 <이런 섭리>가 눈에 띄어 옮겨 적어 보았다.(2013, 11.)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