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bokyung
(토론토대학교 정신의학 박사,
경북대 교육학과 교수(정년퇴임)
한국상담학회 수련감독 전문 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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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으로 성경을 읽다-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6)
kimbokyung

 

(지난 호에 이어)
우리가 성경을 불립문자, 교외별전으로 보게 되면 인간의 생각 또는 소위 이성이나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성경의 본의를 깨닫는데 아무런 방해를 주지 않는다. 


성경의 본의는 “하나님을 신령과 진리로 섬기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의 방법과는 달리, 예수님은 십계명을 일자 일획도 빠트림 없이 읽고 실행하는 방법을 “이웃사랑”에 두셨다. 


인간의 지각과 판단이 망상에 속한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성경을 비합리적이니 비과학적이니 판단하는 것 자체도 무의미하다. 분명한 것은 사람이 생각만 일으키지 않으면, 인간 그대로 하나님의 법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자연의 법칙에 일치하게 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창세기 역시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차 한 잔 들게!”


조주 선사를 어떤 수행자 두 사람이 찾아와서 절을 한 뒤에 그 중 한 사람이, “경전의 대의가 무엇입니까?”하고 묻자 선사는 “자네 이 절에 온 적이 있는가?” 묻고는 그가 “없다”고 대답하자, “차 한 잔 들게!” 했다.


그 다음 사람이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오신 연유가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이번에도 그에게 여기 온 적이 있는가를 묻고, “한 번 있다”고 대답하자, “자네 차 한 잔 들게!”라 했다. 


이 말을 엿듣고 있던 이 절의 원주(院主)가 “스님은 어찌하여 이 절에 처음 왔다는 사람이나 이전에 한 번 온 적이 있다는 사람에게도 “차 한 잔 하라“는 동일한 말씀을 하시는가를 묻자, 선사는 “원주야!” 부른 뒤에 “너도 차 한 잔 해라”고 하셨다. 


이것이 조주의 ‘끽다거(喫茶去!)’라고 하는 유명한 화두다. 화두란 조사(祖師)들의 언행에서 선택된 것으로 1,700개나 있다고 한다. 그 중에는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없다(無)!”라고 대답했다거나, “달마가 동쪽으로 온 연유가 무엇인가?”를 묻는 제자에게 “뜰 앞의 잣나무!”라고 대답했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어떤 조사가 “부처란 무엇입니까?”하고 묻는 제자에게 고함을 지르거나 몽둥이로 친 것도 화두에 포함되어 있다. 조사들은 사람의 생각이나 판단이 사람이면 누구나 본심으로 가진 지혜를 방해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들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지식이나 논리를 버린 사람이다.
제자들의 물음에 대한 그들의 이해하기 어려운 언행은 제자들이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지를 깨닫도록 하기 위한 어떤 의도된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사물사건에 대하는 태도가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시비분별이라고 하는, 따지고 비교하고 성내고 마침내 서로 적이 되게 하는 그런 마음을 떠나버린, 각자(覺者)의 언행이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의 언행과 같을 수는 없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다. 그들은 소동파가 우람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폭포소리에 “번쩍” 자신의 본심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사람과 같이 그들은 화엄, 사사무애법계에 들어간 사람이다. 


“개에게 불성이 있는지, 달마가 중국으로 온 연유가 무엇인지를 따지는 인지의 영역을 이미 넘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개와 같은 동물과도 한 몸이 되어있고, 잣나무와 같은 식물과도 한 몸이 되어 있다. 모든 것이 그들 자신의 일부분이고, 그들 자신이 모든 것의 부분이다. 그들의 눈에는 모든 것이 자비와 사랑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들의 눈은 자비로운 아버지와 같다. 그들의 눈에는 먼 길을 걸어 찾아 온 수행자들이 그들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된다. 


“차 한 잔 들게!”는 자비로운 아버지가 먼 길을 걸어 집에 온 아들에게 한 말이다. 화두를 공안(公案)이라고도 한다. 공안은 정부의 법령과 같다. 화두로 선택된 조사들의 모든 언행은 한 몸에 붙어 있는 손과 발이 서로 소통하며, 공감하며, 배려하며, 희생하는 것과 같은, 사랑과 자비가 누구도 범할 수 없는 법칙 또는 공안으로 들어가 있다. 
깨달음이란 사사무애법계다. 지체들이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과 같이 천지만물이 한 몸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유기체의 공안이 바로 사랑이다. 사람 하나하나가 우주이고 우주의 지체다. 기독교에서 보면 예수님의 언행 전체가 화두이며 공안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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