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bokyung
(토론토대학교 정신의학 박사,
경북대 교육학과 교수(정년퇴임)
한국상담학회 수련감독 전문 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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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으로 성경을 읽다-인간의 본질(10)
kimbokyung

 

 

 (지난 호에 이어)
사람의 학습된 눈은 “파블로프의 개” 처럼 종소리를 종소리로 듣지도 못하고, 음식을 음식으로도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사람은 “배가 고파도 먹지 못하고, 피곤해도 잘 수 없게 되었다.” 종소리는 이제 개인의 이전 경험에 따라 불안이나 두려움을 일으키는 자극으로 변하게 되기도 했고, 탐욕을 일으키는 자극으로 변하기도 했다. 


모든 형상이 우상이 되기도 한다. 개인을 둘러싼 환경전체가 사람의 탐심과 분노 그리고 무지를 일으키는 자극으로 변하게 되었다. 그의 몸과 맘에 붙어 있는 오감이 전부 그렇게 오염되고 말았다. 온 몸이 “도적의 소굴”이 되었다. 


사람이 사회를 통하여 배워 익힌 일반적인 상식으로서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을 얻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중요한 일이다. 선악이라는 관념조차 사람에게 없다면 그것은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세상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으로 눈이 밝아진 아담과 이브를 에덴으로부터 쫓아내었는가? 이것을 불교적으로 말하자면, 기독교인들이 깨달아야 할 화두(話頭)다.

 

5. 공의 지혜 


사람은 누구나 서로 용납되지 않는 두 가지 세계에 양 발을 걸쳐놓고 불안한 가운데서 살고 있다. 첫째의 세상은 자기가 만들어 낸 세계다. 그 다음 세계는 실제의 세계,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하고, 피곤하면 쉬어야 하는” 현실 세계다. 


전자의 경우는 바울 사도가 말씀하신 것처럼, 실은 귀나 발이 한 몸에 속하여 있으면서도 “나는 몸에 속하지 않았다”고 고집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망상과 실제 간의 차이는 결국 사람을 병들어 죽게 한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이 곧 성전”이라 하거나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라고 하는 것은 후자의 경우처럼 자신이 지금 자기의 본심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도적’과 같은 것임을 알고 예수님이 채찍을 만들어 성전을 더럽히고 있는 장사꾼들을 몰아내신 것처럼 몰아내고 자신의 본질을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다. 


공이란 ‘빈 것’이다. 한 몸에 속한 지체와 지체 그리고 지체와 전체의 관계가 공, 즉 ‘빈 것’ 이다. 지체와 지체 간에 경계가 있거나 분별이 있다면 지체들로 한 몸을 이룬 유기체는 살아갈 수 없다. 우리가 인간이 속한 우주자연이나 사회나 교회를 유기체로 보면 천지만물과 더불어 인간의 본질 역시 공, ‘빈 것’이어야 한다.


공은 ‘빈 것’으로 무한한 지혜를 그 안에 갖추고 있다. 태양과 지구의 본질이 공이기 때문에 우주자연의 법칙에 따라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자전하면서 돌고, 태양은 그 밝고 따뜻한 열로 지상의 생물들을 생육한다. 


구름의 본질도 공으로 바람에 따라 움직이게 되고, 물의 본질도 공으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인간의 본심 역시 ‘빈 것’으로 인연에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다. 기독교 관점에서 보면 공이란 인간이 오직 창조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다.


공이란 공기가 찬 곳에서 더운 곳으로 움직이거나 산소와 수소가 만나 “물”이 되게 하는 것과 같은, 물리적 화학적 법칙이지만 인간의 마음과 행동에도 동일하게 작용하는 법칙이다. 


인간의 몸과 몸에 붙어 있는 모든 감각기관들이 물질에 있어서 동일한 물리적 화학적 법칙에 따라 작용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자연환경에 적응할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 자신의 허망한 생각으로 인간은 그러한 우주자연의 속성 또는 통제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과 같은 착각이나 망상은 귀나 발이 실은 한 몸에 붙어있으면서도 서로 경쟁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에 해당되는 자해와 자살의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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