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bokyung
(토론토대학교 정신의학 박사,
경북대 교육학과 교수(정년퇴임)
한국상담학회 수련감독 전문 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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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으로 성서(聖書)를 읽다(28)-“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9)
kimbokyung

 
 

 (지난 호에 이어)
기독교인이 된다고 하는 것에도 위에서와 같은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다. 첫째의 방법은 자신을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며 추악한 존재로 하나님이 자비로 용서하지 않으면 영원한 지옥 불에 던져질 수밖에 없는 무력한 자신으로 보고 애통하며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이다.


둘째의 방법은 자신의 몸이 곧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며 자신이 이미 그리스도의 몸에 붙은 지체라는 것을 확신하고 예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 것처럼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도록 자신을 허망한 생각으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도록 지키는 것이다. 전자의 방법이 예수님이 세상에 오기 전의 구약에서의 방법이라면, 후자의 방법은 예수님이 온 신약에서의 방법이 될 것이다. 


아담의 육체는 흙이었지만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또한 하나님이 자신의 숨을 직접 그의 코 안에 불어넣음으로 생명을 얻어 하나님 보시기에도 완벽한 존재였다. 


아담이 창조된 본래의 그 모습 그대로 에덴에서 살았더라면 그 이상의 완전하고 행복한 삶이 그에게 따로 있을 수 없었겠지만 아담은 뱀의 유혹을 받아 자신이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생각을 일으키게 된, 그 허망한 생각 하나가 그를 스스로 낙원으로부터 쫓겨나게 만든 것이다. 


사람이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하여 후회하며 애통해하며 죄악감을 느끼며 하나님의 용서를 받으려 애쓰고 있는 한 그는 그 죄의 흔적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없다. 


그리고 사람이 자신이 지은 죄나 실수에 대하여 잊지 못하고 계속 그 죄에 매달려 있게 되면 그는 자신과 타인을 선악이나 미추로 계속 비교하게 되고 또한 자신의 무력감이나 죄책감을 보상하기 위하여 이웃을 원망하거나 정죄하게 된다. 


예수님이 가르친 방법은 그것과는 다르다. 예수님의 세상에서의 행적은 바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허망한 생각을 일으키게 되기 전, 아담의 본심 그대로를 가지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대로 보여주신 것이다. 아담은 간교한 뱀의 시험에 졌으나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에서 이긴 것이다. 


예수님의 행적은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살아가야 할 그 모습을 그대로 모델로 보여주신 것이다. 사람도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를 믿게 되는 순간 어린 양과 같은, 어린아이와 같은 본심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그는 혈육으로 낳거나 육정으로 낳거나 사람의 뜻으로 낳거나 간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그 자리에서 회복하는 것이다.


이를 평상심이라고 한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와 아들로서의 특권을 되찾게 되는 것과 같은, 그간의 비정상적이었던 삶에서 정상적인 삶으로서의 회귀다. 달라진 것은 없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보여준 그 삶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할 수 없는 초자연적 또는 초인간적 삶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렇게 믿게 하는 마음 자체는 아담이 선악이나 성범이라는 관념을 가지게 된 이후의 망심의 결과다. 


예수님이 보이신 이적이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것을 믿게 하시기 위한 것으로 이적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 자신도 이적을 보고 믿는 자보다 이적을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인간 역시 누구나 그런 이적 없이도 예수님처럼 배고픈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눠줄 수 있고, 위로할 수 있고, 상처를 싸매줄 수 있고, 병을 고쳐줄 수 있고, 또한 십자가를 함께 짊어질 수 있다. 


인간은 인간 그 자체로서 완전한 것이다. 인간이 인간 그 자체로서의 모습을 벗어나 하나님처럼 되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아담이 뱀의 유혹에 빠지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이미 밀알과 같은 씨앗으로서의 본래면목을 갖추어 있음으로써 태양의 온기와 대지로부터의 습기와 영양분을 받아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백배 2백배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도 다시 이루어지게 하는 본심으로서의 소위 초자연적 그리고 초인간적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이 자신을 포도나무, 사람을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 그리고 하나님을 농부로 비유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정상(正常)이란 사람이 건강하다는 뜻이다. 비정상(非正常)이란 사람에게 병이 생겼다는 뜻이다. 지금 우리는 비정상적인 상태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정상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을 보고 오히려 조롱하며 학대한다. 예수님이나 예수님을 따르던 사도들을 세상 사람들이 오히려 “미쳤다”고 비웃으며 감옥에 가두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 것이다. 어둠이 빛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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