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bokyung
(토론토대학교 정신의학 박사,
경북대 교육학과 교수(정년퇴임)
한국상담학회 수련감독 전문 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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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으로 성서(聖書)를 읽다(25)-“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6)
kimbokyung

 

 (지난 호에 이어)
 지식의 열매는 인간의 눈에 ‘먹음직스럽고, 탐스럽고, 지혜롭게 할 것’ 같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인류는 지식의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눈이 열려, 자신이 마치 전체로부터 분리된 것과 같은 망상을 일으켜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오류를 범하게 된 것이다. 


이제 인간은 그들 자신을 그들이 부분으로 속하여 있는 우주 및 자연과 분리시킴으로써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비유되는 하나님의 세계를 탐욕, 갈등, 무지의 세계로 변질시켜 놓는다. 하나님의 아담에 대한 분노와 예수님의 유대교 지도자들에 대한 질책이 거기에 있다. 


소위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나 예수를 믿을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아담의 분별망상을 대부분 그대로 소유하고 있다. 예수를 믿는 이유로서 사람들은 예수가 보통 인간과는 다르게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초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예수를 믿으면 살아있을 동안에도 남다른 복을 받고 죽어서도 천국에 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게 때문이다. 


그 반면, 예수를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이나 그들의 이성으로서는 성서에 기록된 예수에 대한 행적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는 판단 때문이다. 즉 양자가 모두 그들이 세상에서 배운 지식과 논리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라고 하는 지식의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열린 그런 눈으로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제 2의 눈, 제 3의 눈이 요구된다. 이 제 2의 눈, 제 3의 눈을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성전에 비유한 것이나 바울 사도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한 것에서 발견하게 된다.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의 행동에서도 우린 아담의 망심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 중에는 누가 천국에서 예수님의 오른편에 앉을 것인가를 두고 자리다툼을 하기도 했고, 예수를 돈을 받고 팔아 넘긴 가룻 유다도 있었다. 그리고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 역시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했다.


토마는 부활한 예수를 눈앞에 두고서도 의심하였다. 그들이 비록 예수의 제자들로 예수와 함께 먹고 자면서 예수님의 행적을 아침저녁으로 보아왔으면서도 그들은 정작 아담의 망심에 속하는 분별망상을 버리지 못한 탓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최종적으로, 예수님과 자신 사이에 자타나 내외라는 분별이 없어졌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닫게 되었을 때 그들은 예수님이 세상에서 받은 고난과 죽음까지도 그대로 받게 되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주인으로 섬기고 있었던 지식이나 논리를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어린아이의 마음과 같은 본심을 회복하는 것이다. 인간의 지각과 판단이 마치 ‘어스름한 밤에 길 앞에 가로놓인 새끼줄을 보고도 뱀을 보았다고 고집’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라면 그러한 지각과 판단에 의지하여 예수를 믿는다거나 믿을 수 없다고 하는 판단 역시 허망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분별망상이 탐욕을 일으켜 평화와 사랑을 파괴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에 비추어 어린아이의 마음과 같은 빈 마음은 유기체로 비유되는 우주의 법에 일치되는 것으로써 인간을 살리는 본심으로서의 지혜가 되리라는 것이다. 


인간의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예수를 믿으면 예수의 제자들의 경우처럼 그 마음은 바뀔 수 있다. 그러나 태초의 아담이나 예수처럼 성령으로 잉태된 인간 본심으로 살면 그 자체가 하나님이 거하는 성전이 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뜻과 법에 일치되는 삶을 살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이 보인 행적이 자신의 행적이 된다. 거기에는 예수를 “영접한다”든가 “믿는다”는 관념조차 없어진다. 인간은 누구나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이나 본래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것이다.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임의로 붙인 명칭에 불과하다. 


성서의 본의는 아담의 본심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분별망상으로 죽게 한 상태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방법이다. 아담과 이브가 태초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았다면 그것이 곧 낙원이고 천국이었을 터이지만 자신들도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망심을 일으킨 탓에 인간은 낙원을 잃은 것이다.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천국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보는데 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즉시 그들은 이미 에덴동산을 잃게 되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 순간 자신이 어떤 마음을 가지는가에 따라 바로 지금 여기가 천국도 되고 지옥도 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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