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bokyung
(토론토대학교 정신의학 박사,
경북대 교육학과 교수(정년퇴임)
한국상담학회 수련감독 전문 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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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으로 성서(聖書)를 읽다(21)-“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
kimbokyung

 
 

 (지난 호에 이어)


 10. 사(事)와 이(理)


 시계수리공은 시계를 뜯어보거나 수리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시계가 어떤 원리로 움직이게 되는가를, 시행착오 중에 “앗!”하고 깨닫게 되는 계기를 몇 차례나 체험하게 될 것이다. 시계가 움직이는 현상을 “사(事)”라 하고, 시계가 움직이는 그 이면에 작용하는 원리를 “이(理)”라 부른다. 화두를 참구하게 하는 참선 역시 인간의 사물 지각과 판단 이면에 어떤 이(理), 원리가 작용하고 있는가를 “앗!”하고 발견하는 것이다.


 어떤 수행자는 참선을 통하여 인간의 본심은 호수의 “물”과 같은 것이고, 인간의 망심이란 고요한 호수에 바람이 일어 “물이 파도가 되는 것”과 같은 것이 이(理)임을 깨닫고, 또 어떤 사람은 “무념(無念)”으로 자신의 이전 행동 경험으로 쌓아진 어떤 기대나 선입견이 개입되지 않았을 때 체험하게 되는 사물사건이 곧 사물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이임을 깨닫는다.


 성서 역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행적을 문자로 기록한 역사로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행적 이면에 있는 이(理)를 깨닫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아들을 수도 예수님의 행적을 바로 따를 수도 없다. 예수님의 이적 역시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하는 방법으로 나타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서의 내용을 사(事)로 본다면, 성서의 이면에 숨어 있는 이(理)를 발견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섬긴다든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도 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왜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명했으며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진 아담을 에덴동산으로부터 쫓아낸 것인지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목 또는 재결합이란 측면에서 그 이면에 숨겨져 있을만한 이(理)를 깨닫지 못한다면 예수를 바로 믿지 못할 것이라는 것도 분명하다. 단지 말로 “믿는다”하고, 말로 “서약한다”고 해서 그것이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 만들지는 못한다. 


 성서를 참구하면서 “앗!‘하고 체득하여야 할 이(理)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 예수님과 자신의 관계가 둘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그리고 한 몸에 속한 지체와 지체의 관계임을 몸으로 느끼고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을 별개로 두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거나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이 되고, 자신이 예수님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방법이며 또한 예수라는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가 되는 방법이다. 십자가의 본의(本義)는 자기라는 것을 죽이는 것이다. 부활의 본의는 자기라는 아상(我相)을 죽임으로 하나님의 뜻과 법에 일치되는 자기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는 선(禪)에서 이(理)를 무아나 공이라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자기라는 아상이나 망심이 없어짐으로서 어떤 욕심도 내지 않고 법, 즉 하나님이 결코 인색하지 않음과 같이, 이웃을 위하여 신명을 바쳐 보시하며 희생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이 제 2의 아담으로 보여주신 세상에서의 행적이다. 


 예수님은 인간에게 자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기를 명하신다. 그것은 예수와 인간이 동일한 피와 살을 나눈 형제임을 항상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너를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명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예수가 되면 예수님이 보이신 행적을 그대로 보일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예수를 단지 따르기만 했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예수를 바로 믿게 된 제자들의 변화다.
 

그들에게는 자기라는 것이 사라져 버렸다. 그들의 마음은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 되고, 그들의 몸 역시 예수님의 몸이 되었다. 그들에게는 이제 부끄러움도 없고 두려움도 없어지게 되었다. 그들은 무아라는 이(理), 사랑이라는 이(理)를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공을 이 또는 본질로 하고 있다. 태양도 자기라는 것이 없이 모든 생명체들에게 따뜻한 빛을 발하여 성장하게 한다. 구름 역시 자기라는 것이 없이 비를 내려 모든 생명체를 자라게 한다. 모든 것이 무아로 하나를 이룬다. 인간 역시 공무아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서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살게 되어 있다. 서로 의존하면서 한 몸을 이루게 되어 있는 천지만물의 속성이 무아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일으킨 망심은 곧 모든 것이 서로 무아로 소통하며 무아로 공감하며 무아로 창조주 하나님의 뜻과 법에 일치하도록 되어 있는 이(理)를 방해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아담과 이브의 죄이며,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너희가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예언이다. 이 죄는 아담과 이브가 태초에 지은 죄일 뿐 아니라 지금 우리도 계속 지으면서 반복하는 죄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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