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bokyung
(토론토대학교 정신의학 박사,
경북대 교육학과 교수(정년퇴임)
한국상담학회 수련감독 전문 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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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으로 성서(聖書)를 읽다(12)-“우리가 지금 에덴에서 살고 있는 것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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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은 누구인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인 사람들은 강도들도 아니고 세리들도 아니고 이방인들도 아니었고, 로마의 군인들도 아니었다. 예수를 잡아 죽이라고 소리 지르며 결국 예수를 붙잡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들이야 말로 하나님에 의하여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이라 믿었고 자기들처럼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은 없으리라고 믿고 자랑했던 유대교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었다. 


 어떻게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산다고 했던 그들이 하나님의 외아들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수 있었던가? 예수님을 심문했던 로마총독 빌라도까지도 자기가 보기에는 예수가 큰 죄를 지은 것 같지 않았는데 왜 죽여야 하는가를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묻자 그들은 말하기를, 예수가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여기서 유대인의 하나님에 대한 태도와 예수님의 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달랐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차이를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의 마음과 그 후의 마음에서 각각 찾아볼 수 있다. 


 예수님을 신약성서에서는 ‘어린 양’이라 부른다. ‘어린 양’에게는 선악이라는 분별이나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이 없다. ‘어린 양’에게는 어떤 간교한 마음도 없다. ‘어린 양’의 마음이란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마음이다. ‘어린 양’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않는다. ‘어린 양’에게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따로 없다.


 ‘어린 양’이 가진 마음과는 반대로, 성인의 마음에는 선악이라는 분별이 있고, 수치심과 두려움으로 차있다. 성인의 마음은 백가지 간교한 생각으로 먹으면서도 먹을 수 없고, 자면서도 잘 수 없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그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의 마음은 이미 선악이라든가 귀천이라는 분별적 관념으로 굳어져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차마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는 마음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과 자신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동일시하고 있는 예수를 용서할 수 없었다. 예수는 유대에서 이름도 없는 가난한 동네, 나사렛 목수의 아들이 아니었던가!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렀을 뿐만 아니라 인간 누구라도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다.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의 숨으로 생기를 얻게 된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 그리고 하나님의 외아들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형제자매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에게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의 본래의 마음을 되찾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회복하도록 가르치신 것이다. 예수님은 아담의 본심에 그대로 머물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회복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그대로 보이신 것이다.


 그것에 비하여, 유대교 지도자들은 아담과 이브가 낙원에서 쫓겨난 이후 동침하여 낳은 카인과 아벨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까지 서로 시기와 질투를 느끼며 서로 미워하고 서로 죽이기도 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유대교 지도자들의 하나님에 대한 태도는 마치 아버지를 떠났던 탕자처럼 현재 남의 돼지나 치면서 멀리 계신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하는 상태에 있었다고 하는 것에 해당된다면 예수님의 하나님에 대한 태도는 탕자가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 종이 아니라, 아들로서의 특권을 다시 누리고 있는 아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을 영접하는 사람은 그가 비록 혈육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태어났을지라도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것을 깨달을 수 없었다. 그들은 아담의 망심으로 고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예수가 세상에 다시 오면 누가 가장 먼저 예수를 죽여라고 소리칠 것인가? 


 선악이라는 관념이 아들의 마음에 들어와 자리를 잡게 되면 수치심과 두려움으로 아버지로부터도 자신의 몸을 감추고 숨기게 된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의 태도가 그런 것이었다. 그들은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다. 


 무엇이 인간의 무지(無智)인가? 무지란 자신이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아들인 줄을 모르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이글어진 자화상(自畵像)이다. 아담의 망심으로 섬기는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으로 감히 그 앞에 서지 못할 하나님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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