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bokyung
(토론토대학교 정신의학 박사,
경북대 교육학과 교수(정년퇴임)
한국상담학회 수련감독 전문 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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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으로 성서(聖書)를 읽다(11)-“우리가 지금 에덴에서 살고 있는 것이라면. ”
kimbokyung

 

 (지난 호에 이어)
 탐욕과 심신의 잠잠함은 동시에 일어날 수 없는, 상반(相反)관계에 있다. 분노나 원망이나 증오감 역시 ‘잠잠한’ 마음과는 동시에 일어날 수 없고, 어리석은 마음 역시 그렇다. 비둘기와 같이 고요한 그리고 평화로운 성령의 체험 역시 욕심이나 분노나 수치심이나 두려움이나 선악이라는 정죄나 어리석음과는 동시에 일어날 수 없는 상반관계에 있다. 


 자신을 오직 하나님만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게 하거나 자신을 예수라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아(自我)라는, 이전 행동 경험으로 학습된 지금의 마음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거듭 남’이며 다시 “성령으로 하나가 되고, 또한 성령을 숨 쉬게 되는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길이 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어떤 이유에서든 ‘거듭 남’을 원한다. 심리치료의 목적도 거듭 남을 위한 것이고, 선수행의 궁극적 목적인 견성도 ‘거듭 남’을 위한 것이고,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도 ‘거듭 남’을 위한 것이다. 무엇으로부터 ‘거듭 남’인가 하면, 이전 경험과 행동으로 ‘학습된’, 또는 ‘오염된’ 자신으로부터의 ‘거듭 남’이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보이신 행적은 성령으로 ‘거듭 난’ 사람, 즉 성령으로 생명을 얻게 된 자신의 본래 모습을 되찾은 사람만이 나타낼 수 있는 행적을 대변하고 있다. 그는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또한 하나님의 숨으로 생기를 얻게 된, 제2의 아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유산으로 받은 사람의 지혜와 능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은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내 안에 거하신다. 나의 몸이 곧 성전이기 때문이다. 나의 몸은 예수님의 몸,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로. 예수님의 피와 살이 나의 피와 살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로서 내가 한 몸에 붙어 있는 귀든 발이든 머리든 심장이든 간에 자타나 내외나 선악이나 귀천이라는 분별망상이 없이 그리고 서로 한 몸으로 소통하며 서로 의지하고 서로 사랑하게 된다. 이것 이외, 예수님을 따로 영접하는 방법이 없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천당에 간다”는 것과 같은 생각이나 믿음은 아담의 망심에 속한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의 몸에 붙은 가지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회복한다는 것으로, 거기에는 이미 천당이니 지옥이라는 분별도 사라진 오직 안심(安心)이 있을 뿐이다. 땅에서 이루어짐 없이 하늘에서 이루어짐은 있을 수 없다.


 참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이전 행동 경험의 결과 또는 학습의 결과인 지금의 마음을 제거하는데 있다. 즉 분별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런 것이었으며 예수님이 참 이웃이라고 칭찬한 사마리아인 공통된 특징이 그런 것이다. 


 인간은 지금도 반복 선악과를 따먹으며 자타나 내외나 선악이라는 관념을 강화시켜 가고 있다. 인간은 그것을 자신으로 하여금 창조주 하나님처럼 전지전능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으로 착각하고 있지만 실은 인간이 자타나 내외나 선악으로 분별하게 하는 세계는 자기라는 갈애(渴愛)를 만들어 스스로 병들어 죽게 한다.


 인간이 무상한 환경변화에 적응해 가기 위해서는 이전 경험을 통하여 자신을 계속 변화시켜가는 지혜, 학습이 필요한 것이지만, 마치 마약에 중독되는 것처럼 이전 경험, 예를 들어 탐욕이나 분노나 어리석음에 고착되어 자신의 마음이 마치 ‘도적의 소굴’처럼 되어버리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갈 수 있는 본래의 지혜를 잃어버리게 된다. 성전이 ‘도적의 소굴’이 되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가 사는 지금의 이 땅이 낙원인가 지옥인가는 우리가 이 땅을 어떻게 지각하고 해석하는가에 달려 있다. 
 하나님이 태초에 창조하신 천지만물은 지금도 한 치의 변화도 없이 그대로 남아 있다. 지구는 그 때나 지금이나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으며, 공중에는 새들이 날고 있고, 물속에는 물고기 떼들이 헤엄을 치고 있으며, 땅위에는 들짐승들이 기어 다니고 있다. 변하여 가는 것은 인간의 패러다임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아담과 이브가 살았던 그 때의 에덴 그대로의 낙원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마음에 속아 낙원을 낙원으로 보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창세기는 지나간 옛 이야기가 아니며 더군다나 신화(神話)가 아니다. 선악과에 얽긴 이야기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이야기다. 성서 전체가 선악과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인간이 다시 하나님과 화해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 방법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거듭 남’에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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