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bokyung
(토론토대학교 정신의학 박사,
경북대 교육학과 교수(정년퇴임)
한국상담학회 수련감독 전문 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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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으로 성서(聖書)를 읽다, “우리가 지금 에덴에서 살고 있는 것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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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김보경 칼럼)

 

선(禪)으로 성서(聖書)를 읽다

 

“우리가 지금 에덴에서 살고 있는 것이라면...”

 나, 즉 ‘자기(自己)’라는 것을 그대로 두고 나의 몸이 오직 하나님만 그 안에 거하시게 되는 성전이 되거나 포도나무에 비유되는 예수님의 몸에 붙은 지체가 될 수 있는가? 진실로, 그렇게 되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가 단지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빈다고 하여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 내가 소나 양을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 그리스도의 몸에 붙은 지체가 되자면 어떤 심리적 조건을 내가 갖추어야 하는가?

 

 나는 선에서 참선(參禪)의 목적이 되는 것과 같은 깨달음, 견성(見性)이 성전이 되거나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되는 방법이라 믿는다. 기독교에서 성령을 강조하는 이유 역시 거기에 있다고 믿는다.

 

 바울 사도가 성도들에 대하여 “성령으로 하나가 되었고, 동일한 성령을 숨 쉰다” 하신 말씀 역시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처럼 나름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게 됨에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던 상태에서부터 창조주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는 인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 온다는 견성을 의미할 것이다.

 

 선에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한다. 인간의 말과 문자로 기록된 성서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인간이 창조되기 이전에 이미 계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말과 문자에 의존해서 알고자 하면 할수록 그 본의는 더 멀리 도망가게 된다.

 

 에덴에서 사는 사람에게는 어떤 인위적인 노력도 필요하지 않다. 그대로 살면 그것이 곧 낙원을 낙원으로 향유하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의 몸은 본래 성전이며,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다. 아담처럼 스스로 생각을 일으켜 “도적의 소굴”로 만들지만 않으면 된다.

 

 우리의 눈은 이미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로 얻게 된 지식과 동일한 망심으로 채색되어 있어서 내가 보고자 하는 것만 보게 되어 있고, 내가 믿고자 하는 것만 믿게 되어 있다. 내가 믿는 하나님도 내가 창조한 것이고, 내가 믿는 예수도 내가 창조한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하나님의 외아들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왜 하필이면 그들보다 하나님을 더 잘 섬기는 사람들이 없다고 믿어왔던 그 당시 유대교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셨는지를, 하나님과 자신들의 관계를 선악이나 귀천이나 주종으로 분별해서 믿었던 사람들과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 즉 동체로 보았던 예수님과의 차이에서 찾는다.

 

 다시 말하면 유대교 지도자들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생긴 눈으로 하나님을 보면서 섬겼고, 예수님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처럼 자기라는 것이 따로 없이, 자기는 하나님 안에, 하나님은 자기 안에 거하신다는, 자기의 몸이 곧 성전이 되어 하나님의 뜻이 곧 자기의 뜻이 되도록 산 삶이라 본다. 선에서 말하는 무아나 공이란 뜻이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살면서 일으키지 않아야 할 망상을 일으키게 됨으로써 에덴을 잃었다. 우리 역시 그러한 어리석음을 되풀이 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여기에서의 삶이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이 이 세상 자체가 그래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눈이 낙원을 낙원으로 보지 못하도록 오염되었기 때문일까?

 

 개인이 속한 사회나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을 통제하는 우주는 유기체다. 유기체로 비유되는 교회나 사회나 우주의 부분으로 속해 있는 인간의 본질이란 본래 비어 있을 수밖에 없다. ‘거듭 남’이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 목적이라 볼 때 인간의 본질을 개인이 속한 사회나 자연이나 우주를 역시 유기체로 보는 과학이나 인도의 불교사상이나 중국의 무위자연사상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몸이 유기체인 것처럼 우주 역시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다. 인간의 지식은 인간을 전체로부터 분리시킨다. 본래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할 가지로서의 자기를 스스로 분리시키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것은 곧 말라 죽음을 의미한다.

 

 “나는 포도나무, 너희는 가지”라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에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열매, 선악과”는 결코 따먹지 말라고 명령하시면서 그것을 따먹는 날에는 “너희가 정녕 죽으리라”고 경고하신 그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게 된다.

 

 이 글은 2장으로 나누어진다. 제1장은 성도가 속한 교회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나라는 사람의 몸과 같은 유기체라고 하는 점에서 한 몸에 붙어있는 손이나 발의 본질은, 자기라는 것이 따로 있을 수 없는 공(空)이란 것을 지적한다.

 

 제2장은 사람의 본질이 ‘자신이 곧 성전’이라 하거나 ‘자신이 곧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지 못하게 방해하는 조건으로 모든 것을 자타나 선악으로 분별하게 하는 인간 나름으로의 생각, 즉 말과 문자를 지적하며, 진실로 자신이 ‘성전’이 되고 ‘가지’가 되기 위한 방법, 즉 견성을 위한 방법으로, 정혜(定慧)가 바탕이 되고 있는 선수행법을 소개한다.

 

 인간의 생각이란 경험을 통하여 학습된 것에 불과하다. 인간의 생각이란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본질과 일치하지 않는다. 창조주 하나님과 화해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곧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고 또한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로서의 본질에 귀의할 수 있도록 자기라는 것을 버리는 것이다.

 

 이 글의 내용은 동-서를 문화적으로 나누고 있는 불교와 기독교 간의 공통점을 발견한다는 점, 기독교에 있어서 구약과 신약의 특징을 이해한다고 하는 점, 그리고 종교와 과학간의 경계가 무엇인가를 이해한다는 점 등에 있어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얻게 되었다고 하는 망심, 즉 지금 우리가 본심이라고 믿고 있는 마음이 실은 이전 경험을 통하여 학습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함으로써 그 차이를 허물어 버릴 수 있으리란 것을 지적하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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