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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숙
문협회원
부동산캐나다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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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변경선 동과 서(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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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시련은 결코 혼자 오지 않는다


3월이 되었다. 성급한 봄은 대지에 내리지 못하고 공중에서만 펄럭이고 남실거렸다. 
어느 날 아침. 속이 몹시 쓰리더니 먹은 것을 다 토해내고 말았다. 방안 온도를 화씨74도까지 올리고 두터운 스웨터를 걸쳤는데도 사시나무 떨리듯 온몸이 떨리고 나른해지면서 비실거렸다. 며칠을 계속하고 나니 눈만 휑한 게 금방 쓰러질 것만 같은 몰골이었다.


“응? 웬일이지.” 


여러 가지 불길한 상황을 늘어놓고 주사위를 던져보았다. 허약한 체질인데다 중한선고를 받은 어머니가 계시니 엉뚱한 망상은 밤에 잠을 이룰 수 없게 괴롭혔다. 눈자위가 푹 꺼진 창백한 얼굴, 이마에 긴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드리우고 잦아들듯 새근거리며 잠들어 있는 ‘숙’을 내려다보면 크고 중한 병에 이르기까지 온갖 증세가 머릿속에서 회전목마를 타듯 어지럽게 돌아갔다. 


“학회참석 포기하고 병원에 먼저 가봐야겠어.” 


4월초에는 애틀랜틱시티에서 미국연방의학자회의가 열릴 예정이었다. 이번엔 가족을 다 데리고 갈 계획으로 호텔예약까지 마쳤는데 불과 몇 주 안에 기력을 회복할 수 있을지 자신할 수가 없었다. 혼자라도 가라고 우기지만 그건 더욱 불안한 일이었다. 


2주 후에 닥터 패터슨과 약속을 하였다. 4월이 시작되자 각 학교는 이스터(부활절)방학을 하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떠났다. 온 교실 연구원들은 학회 참석차 떠났는데 홀로 뒤에 처져서 병원에 다니느라 바빴다.


“부활절엔 아무리 못생긴 여자라도 새 모자, 구두 그리고 드레스 한 벌은 얻어 입는다.”


 여인들의 자랑 섞인 부산한 나들이가 봄바람을 휘젓고 다녔다. 창문만 열면 싸 아 하니 폐 속 깊이 파고드는 새 풀 향기가 발길을 밖으로만 유혹하는데 오히려 비켜가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답답하게 온 몸을 짓눌렀다.


“우리도 어디든 좀 갔으면 좋겠어요.”


“조금만 참아. 병원에 다녀오기 전엔 아무데도 안 갈 거니까.” 단번에 잘라 말했다. 


그 마음인들 이 화창한 봄날에 얼마나 밖에서 떠돌고 있을까. 동창생 누구누구를 만날 수 있다며 그토록 기대에 차 있었는데 아무도 없는 빈 연구실에 혼자만 왔다 갔다 하는 마음이 결코 평온할리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숙’이 아프다는 이유가 더 진정할 수 없이 마음을 괴롭히는 것이었다. 


 “하이 미시스 쏭. 축하합니다. 애기로군요.” 


닥터 패터슨이 경쾌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 심장 한복판으로 커다란 돌덩이가 털썩 떨어지듯 꽝하고 울렸다. 진동이 온 몸에 퍼지면서 부들부들 떨렸다. 윙~ 바람개비 돌듯 이명이 울리면서 눈앞이 어지러웠다.
 “다행이야. 애기라서. 별 이상은 없다는 군.” 


환하게 펴지던 아빠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운 그늘로 덮였다. 고개를 푹 숙인 ‘숙’의 모습에서 가늠할 수 없는 불안이 검은 연기처럼 번져왔다. 닥터 ‘패터슨’의 벗겨진 이마 가득 굵은 주름살이 깊게 패였다. 


“기쁘지 않으십니까?” 목이 잠겨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양미간, 눈가 할 것 없이 온통 주름살 투성이가 된 닥터 ‘패터슨’의 대머리가 몇 번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이 애들을 보세요. 얼마나 귀엽습니까. 이렇게 영리하고 예쁜 애기를 또 하나 가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영’과 ‘현’의 머리를 차례로 쓰다듬어 주었다. 


“‘수지’(숙)가 도움 없이 애기들을 기르느라 심신이 많이 쇠약해지고 있는 건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잠시 생각하던 닥터 ‘패터슨’이 아빠를 향해 바로 앉았다. “당신도 의사니까.” 


낮은 음성으로 몇 마디 주고받으며 메모지에 닥터들의 이름을 적어주었다. 


 돌아오는 차 속에선 두 아이들의 부산한 소리만 들릴 뿐 무거운 침묵에 잠겨있었다. 


 “애기…” 


 기쁨도 슬픔도 아닌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의 덩어리가 무겁게 짓눌러서 온몸은 운신의 기능마저 잃은 듯 맥이 풀렸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굴레를 벗겨 줄 도움이라도 청하듯 아빠를 바라보았다. 그때까지 묵묵히 앉아 있던 아빠는 또 한참을 그대로 있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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