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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숙
문협회원
부동산캐나다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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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변경선 동과 서(37)-크리스마스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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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성탄절 휴가로 교실이 텅텅 비어가는 어느 날 아빠가 어두운 얼굴로 돌아왔다. 


“딱 터 ‘홍’ 한테서 편지가 왔는데 내 비행기 값을 이달 내로 갚으라 했더군. 난 내 여비가 그랜트 연구비에서 나온 줄 알았는데 웬 일인지 모르겠어.”


한국에서 맡고 있던 연구과제는 미국기관에서 왔고 초청 조항에는 분명히 연구원이 도미할 경우 여비일체를 지불해준다고 되어 있어서 비행기 표는 학교에서의 대여가 아닌 것으로 알고 있었다. 어찌됐던 갚긴 해야겠는데 당장 수중에 그만한 돈이 없으니 난감하였다. 


‘숙’과 ‘영’의 비행기 값을 청산한 게 지난달이고 입원비는 적지 않은 부담이었으나 귀여운 자식 데려 오는데 빚질 수야 있느냐며 그 자리에서 갚아 버렸다. 미국에 온지 겨우 11개월, 천불이 넘는 돈을 빼냈으니 무엇이 남겠는가. 그래도 예금 통장에는 2백 불 정도의 예금이 있었다. 이것으로 6백 불의 여비를 일주일 내에 갚아야 되는 것이다. 


“지난 번 오셨을 때 귀띔이라도 해주셨으면 좀 나았을 텐데 아무 말 없이 그냥 가시더니. 딱 터 ‘홍’이 퍽이나 야속한 듯 했다. 한국에서라면 어디고 뛰어가서 손을 내밀어 볼 곳이 더러는 있겠지만 수륙만리 이역, 어디 가서 돈을 마련할 것인가. 그렇지 않더라도 성탄절이 내일 모레인데 모두들 돈이 필요하고 있는 대로 아끼지 않고 다 써보는 계절이 아닌가.


 누구에게 입을 벌려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미국인들은 모두 아주 간단명료하고 온당한 생활 철학을 가지고 사는 듯했다. ‘일 한 만큼 벌어서 그 만큼만 쓴다.’는 것이다.


금전문제에 있어서만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철저하게 인색함을 지키는 것이 이곳에 사는 한국인들의 사고방식이었다. 돈이 많은 사람은 많은 대로, 적은 사람은 적은 대로 모두들 떠돌이 같은 삶에서 오는 불안정한 마음이 누구에게 여유 있게 돈을 빌려주고 받는 것을 싫어하였다. 


공연히 신경 쓰고 우정에 금이 가고 때론 금전에 손해 보는 일이 없을 수 있겠는가. 아예 처음부터 손을 씻는 것이 관습처럼 되어 있었다. 


 “어떻게 하나. 시일이 촉박해서 더 곤란하군 그래” 


식탁에 턱을 괴고 앉아 한숨만 푹푹 쉬고 있었다. 오른 손으로 턱을 괴었다 왼 손으로 바꾸어 괴고, 다시 오른 손으로 고쳐 괴며 한숨만 쉬고 앉았으니 보기에도 숨이 막힐 지경으로 답답하였다. 


“그러지 말고 예금통장 수표책 다 갖다 놓고 주머니 털어서 우선 계산이나 좀 해 봐요.”


그래도 ‘숙’이 나은지 모르겠다. 남자들은 뭉치를 헐어서 갚을 줄은 알지만 조각조각 붙이고 기워서 맞추는 일은 역시 여자의 특기인 듯하였다. 


비행기 값 $558이 빚이었다. 예금통장에 $260, 수표책에 $90, 아빠의 바지 뒷주머니에서 $8, 그리고 ‘숙’이 지난번 장보러 갔다가 남은 돈 전부 터니 $62.23이 나왔다. 총액 $420.23 이었다. 


“이게 우리 총 재산이야?” 어이없어 헛웃음만 웃고 있었다. 


“가만있어 봐요...” 잠시 생각하다 이층에 올라가 핸드백을 들고 내려왔다. 패스포드 갈피에서 꼭꼭 접은 100불짜리 한 장과 50불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주었다. 


 “응 이게 웬 거야?”


“미국 와서 곧 출산을 해야 되니까, 아무래도 마음이 안 놓여 바꾸어 왔어요.” 자랑스럽게 말했다. 


미국 간다고 떠나는 처지에 한국 돈을 미화로 바꾸어 가며 설레발을 치는 것은 올곧지 않은 일이라 생각해 왔다. 고학을 하는 것도 아니고 돈을 벌면서 공부할 사람이 구태여 넉넉지 않은 외화를 축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작은 애국심까지 앞세웠었다. 


몸만 오면 되니까 쓸데없이 이것저것 싸가지고 올 생각은 말라고까지 했지만 그래도 객지에서의 출산이 불안하여 $150을 바꾸어 온 터였다. 지금 같아선 그때 허용 액 $300을 다 환전할 걸 그랬다는 엷은 후회감이 들었다. 


비닐주머니에 넣어 싸고 또 단단히 싸서 트렁크 밑바닥에 넣어 온 미역을 보고 그렇게 놀리더니, 힘들게 가져 온 미역으로 국 하나 제대로 끓이지 못하고 소동을 벌이던 걸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난다.


그게 바로 아빠의 현주소라는 걸 재확인하는 듯했다. 한 동안 말없이 돈을 내려다보고 있던 아빠가 한숨처럼 말문을 열었다. 


“나도 정말 정신 좀 차려야겠어. 이제 네 식구가 되었으니 한국에 돌아간대도 여비만 천여 불이 드는데 잘못하다간 오도 가도 못하고 봉변당하겠어.”
 그렇게 바라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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