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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숙
문협회원
부동산캐나다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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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변경선 동(東)과 서(西)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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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호에 이어)
 수면제를 먹고 한숨 잘 자고 난 길이었다. 어느새 밤이 가고 아침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온통 하얗게 회칠을 한 병실엔 또 한사람의 미국여인이 있었다. 어제 아침에 네 번째의 딸을 낳았다는 애기엄마는 벌써 일어나서 세수하고 화장하느라 부산하였다.


 입술연지를 새빨갛게 칠하고 환자용 가운을 훌훌 벗어던지고 집에서 싸가지고 온 화려한 가운으로 갈아입더니 어딘가에 전화를 거느라 바쁘다. 


 ‘집에 전화를 좀 해볼까?’ 갑자기 엄마가 없어진 밤에 잘 잤는지 모르겠다. 환자용 의자에 앉는 엄마를 보고 와 앙하니 울던 ‘영’이 공연히 걱정이 되었다. 밥은 잘 먹었는지, 어제 저녁엔 목욕을 시키고 재웠는지, 정말 하찮은 자질구레한 걱정들이 연이어 스쳐갔다. 


 “응 마미야!? 잘 잤어? 별 이상 없구? 참 잘 됐어 아들하나 또 생겼지. 걱정 말고 무조건 많이 먹고 푹 쉬어. 내 ‘영’이 바꾸어 줄게.” 달가닥하고 수화기 드는 소리가 났다.


 “엄마! 엄마 왜 집에 안 와? 나 아빠 말 잘 들어. 응. 젤로두 먹구. 감자두 먹구 그랬어. 응. 엄마 빨리 와.”


 점심 면회시간에 잠깐 들리겠다, 하고 전화는 끝났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전화기를 타고 온 ‘영’의 어리고 귀여운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왜인지 갑자기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엄마와 아빠를 독차지하던 그 좋은 때는 벌써 다 지나갔는가. 항상 귀엽고 영리한 꼬마로 두고 싶었는데 동생에게 밀려나서 다른 생활권으로 들어가야 하는 ‘영’이 애처로웠다. 


 벌써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는 무상한 자아인식이 거기에 중압감을 더했다. 어쩔 수 없이 세월따라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새로 태어난 아기가 일깨워 주기라도 한 듯, 한 아이의 엄마 때는 느껴보지 못한 서글픔이 밀려왔다. 소리 없이 양 볼로 뜨거운 액체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감당할 수 없는 외로움이 흐느낌으로 변하자 그만 이불을 뒤집어쓰고 펑펑 울었다. 


 첫 아이 때도 울기는 했다. 그때는 가만히 앉았다가도 ‘훈’만 쳐다보면 눈물이 났었다. 


 자신은 첫 아들을 얻었다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애를 쳐들고 다니면서 한시도 손에서 놓지 않으려고 하는데 멀거니 바라보는 ‘숙’의 기분은 착잡하기 한이 없었다. 


 불쌍한 사람. 누이도 없이 독자로 태어나서 한도 없이 고임만 받고 귀히 자란 아들인데 세상모르고 무사태평인 그가 애기 아빠가 되어서 삶의 고달픔을 지게 되었구나. 


 새 액. 새 액. 자는 애기를 드려다 보면 이제 내가 몸과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때는 다 지나갔구나. 저 아이 때문에. 처량한 생각에 울고 또 울었었다. 


 수륙만리 머언 이국의 한 병실에서 진심으로 기뻐해주고 대견스레 어루만져 줄 어머니의 인자한 미소도, 형제나 친척, 친구도 없는 지금의 이 슬픔은 비할 바가 아니었다.


 계절은 청명한 가을. 폐 속까지 싸아하니 낙조의 우수가 밀려드는데 누군들 이 서러움을 참고 견딜 수 있으랴. 흐윽. 밥 한 술 떠먹고, 또, 흐윽 느끼다 밥 한 술 떠 넣고. 


 살기 위한 생물의 본능은 이토록 처절한 것일까 아침을 먹자니 생물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조건이 연민의 정으로 밀려 왔다. 


 그러나 애기용 유리침대를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본 순간 또 하나의 본능은 여과기를 통과한 물같이 맑고 순전한 환희로 요동쳤다.


 애기 팔에 감은 이름표와 번호를 엄마팔의 것과 맞추어 본 간호사는 아기를 엄마에게 안겨주고 4온스쯤 되는 우유병 하나를 주고 갔다. 따뜻한 우유병을 들고 팔에 안긴 아기를 내려다보는 엄마의 표정은 이 세상에 속한 그림이 아니었다.


 아기 방 간호사는 벌겋고 허옇고 그저 뭉클거리기만 하는 아기들을 깨끗이 씻겨서 여자아기는 핑크색이나 꽃무늬가 있는 잠옷, 남자아기는 파랑색이나 동물무늬잠옷으로 갈아입혔다. 머리도 가르마를 타서 곱게 빗질하여 뒤 꼭지에 소복하게 모이도록 예쁘게 단장을 시켜 데리고 왔다.


 엄마와의 첫 대면인데 아기들은 눈을 감은 채 고물거리기만 하였다. “어디 어떻게 생겼나 좀 보자.” 더욱 힘주어 끌어안으며 내려다보니 그저 새까맣다. 그도 그럴 것이 저쪽을 보고 모로 누워 있으니 뒤 꼭지만 보이는데 새까만 머리털이 소복하니 목덜미까지 나 있지 않은가.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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