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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숙
문협회원
부동산캐나다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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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변경선 동(東)과 서(西)(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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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호에 이어)
 먼 곳이 아니더라도 좋고 심지어는 집 뒤뜰에서 텐트를 치고라도 주말은 가족과 즐긴다는 것이 신념처럼 되어있는 이들을 보며 항상 ‘훈’을 놀려주었다. 


 “여긴 다방이 없고 당구장이 없어 내가 살 맛 나요. 막걸리 집이 없어서 재미없겠어요.”


 약을 올려 주지만 그때마다 “참 내가 그렇게 산 때도 있었나.”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늦게 끝나도 으레 집에 오기 전에 친구들과 만나 한잔하고는 아무렇게나 쓸어져서 자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한국의 아빠들은 또 주말이면 주말대로 당구치고 다방으로 돌아다니느라 하루해 보내기를 일 년 내내 반복하는 터였으니 여인들에겐 미국은 최고의 안식처였다. 


 ‘영’을 데리고 쇼핑센터에 도착했을 때는 그 넓은 주차장이 휑하니 비어있는 한 낮이었다. 가끔 식료품점에나 따라가 본 ‘영’은 신이 나서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엄마 나 이거 사줘” “엄마 저것 봐. 저기 로켓. 나 저것 두 사줘.” 눈에 띄는 대로 다 사달라고 조르고 만져보고 또 만져보고 하다가 엄마를 잡아끄는 것이었다. 백화점은 처음이라 눈앞에 전개된 모든 것이 신기하고 경이로웠다. 갓난애들 기저귀서부터 침대나 소파 같은 큰 가구까지, 냉장고, 오븐, TV 참으로 없는 것이 없었다.


 전기기구나 작은 기구들은 무엇에 쓰는 것인지 조차 알 수가 없었다.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편하게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곳이 미국이라고 새삼 느껴졌다. 


 털실가게에서 계획했던 대로 털실을 샀다. 키가 늘씬한 점원이 상냥하게 웃으며 다가오더니 털실의 굵기에 맞추어 뜨게 바늘 두 쌍을 골라주었다. 기다란 장총하나와 로켓을 사들고 밖에 나오니 뜨거운 해는 중천에서 비켜서고 둘이는 다 지쳐있었다.


 울긋불긋한 상품들이 바닥에서 천정까지 쌓여있는 드넓은 백화점 안을 무려 두 시간이나 돌아 다녔으니 다닐 때는 모르겠던 다리가 갑자기 힘이 싹 빠지는 듯 뻣뻣해 지면서 그대로 그 자리에 털석 주저앉고 싶어졌다. 


 “엄마 합승타고 가.” ‘영’이도 걷기 싫어서 칭얼대기 시작하였다. 


 “그러지 말고 천천히 걸어가자.” 한심했다. 합승이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택시가 있어도 부를 줄도 모르는 처지가 아닌가. 그렇게 좋아라고 뛰어 나오던 ‘영’이 장총도 무거운지 땅에 질질 끌면서 뒤에 처져서 따라오는 것이 측은하게까지 보였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도 자신도 한없이 초라해 보이고 지나가는 자동차들이 먼지를 피우는 것조차 심사에 거슬렸다.


 ‘끼 이-익’ 조그마한 폭스바겐이 옆에 와 서더니 운전석에서 한 중년신사가 내리면서 차문을 연채 타라고 하였다. 생면부지의 미국인이 차를 태워 주는 게 겁이 전혀 안 나는 건 아니었지만 ‘영’이부터 걷지 않게 된 것이 무엇보다 다행이어서 얼른 올라탔다.


 거의 다섯 시가 다 되었으니 ‘훈’이 퇴근할 시간도 되었다. 집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면 얼마나 놀랄까 걱정도 되었다. 그 신사는 ‘영’과 ‘숙’을 태우더니 집이 어디냐고 묻지도 않고 곧장 ‘숙’이네 아파트촌으로 직행하는 것이었다. 좀 의아해 하면서 주뼛 주뼛 말했다.


 “알렌허스트에 아파트가 있어요.” 그 신사는 ‘숙’을 한번 흘깃 쳐다보더니 허허허 웃었다. 


 “압니다. 584호에 살지 않습니까? 난 582호에 사는데 그렇게 모르십니까?”  그러더니 ‘영’에게 “하이 꼬마야 나 누군 줄 알겠니?” 하고 묻는 것이었다. 


 “응. 리처드 아빠야.” 그는 ‘리처드’라는 말에 그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종일 집안에서만 사니 옆집 사람도 모르고 지내지만 유일한 동양인인 ‘숙’이네를 이 주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출장


 이사 온 지도 보름이 지났다. 아침에 ‘훈’은 학회 참석차 워싱턴으로 떠났다. “뭐 급한 일 있으면 닥터 ‘황’이나 닥터 ‘정’께 연락 해.”


 일가족이 다 떠나는 닥터 ‘게일’네와 연구실이 다 비다시피 모두 떠났으니 달리 도리가 없긴 하지만 ‘게일’네 자동차에 뛰어가 올라타는 ‘훈’의 뒷모습을 멀리 창문에서 배웅하던 ‘숙’은 자기 일에 충성을 다하는 남자들의 냉정성을 얼마나 미워했는지 모른다.


 이제 온지 겨우 보름밖에 안되는데 일가친척 하나 없이 아파트에 숫기 없는 엄마와 어린 아들을 남겨 놓고 훌훌히 떠날 수 있는 그가 더 할 수없이 무심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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