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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숙
문협회원
부동산캐나다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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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변경선 동(東)과 서(西)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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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호에 이어)
 벌써 웬만한 장소는 먼저 온 사람들이 다 차지하고 둘러앉아서 바비큐를 시작했는지 여기저기서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나고 고기기름 타는 냄새가 코에 와 감겼다. 


 “주말이라 벌써 이렇게 몰렸군.” 닥터 ‘황’이 중얼거리며 구내를 몇 바퀴 돌고 나서야 겨우 마땅한 장소 하나를 찾았다. 


 조카와 ‘린 다’ ‘영’은 어린이 놀이터에 가고 어른들은 불을 피워 불고기와 돼지갈비를 굽기도 하고, 종이컵 접시 등을 펴 놓고 점심준비를 하였다.


 색을 곱게 맞추어 얌전하게 버무린 잡채, 오이생채 오랜만에 대하는 김치와 곁들여 정말로 사양치 않고 실컷 먹었다. 새파란 하늘에 둥둥 뜬 구름을 보며 산새소리, 바람소리가 환상곡을 연주하는 공원에서의 한식은 더욱 산듯하니 입맛을 당기는 최상의 성찬이었다.


 “한국 국내 사정은 요즘 좀 어떻습니까?” 종이컵에 커피를 따르던 닥터 ‘황’이 물었다. 


 “굉장히 달라졌습니다. 높은 건물이 하루 밤 사이에 척척 들어서고 넓은 길이 몇 달 사이에 자꾸 생긴다고나 할까요. 부작용도 더러 있는 것 같지만 아직까진 많이 발전했다는 것으로 알고 있을 뿐입니다.”


 “내가 62년 초에 여기 도착했는데 내가 오기 전 오년간은 그렇게 큰 변화가 없었는데 떠나온 뒤의 오년간은 굉장한 변화가 생긴 모양이군요.” 닥터 ‘황’이 고개를 갸웃하였다.


 “아마 지금쯤 가보시면 아주 놀라실 겁니다.” ‘훈’이 말을 받았다.


 “그보다도 우린 아들애 하나를 할머니께 맡기고 왔는데 늘 걱정이 되어서 누구든 새로 온 한국인만 만나면 한국 사정부터 묻는 게 버릇이 됐어요.” 미시스 ‘황’이 끼어들었다. 


 닥터 ‘황’은 4년 선배이나 나이는 6, 7년 위라고 하였다. 5년 전에 돌이 막 지난 아들을 친정에 맡겨놓고 와서 나가던지 데려오던지 해야 할 텐데 뜻대로 되지 않는다며 한숨을 쉬었다.


 “아주 잘 하셨어요. 식구가 모두 이렇게 같이 오시길. 굶으나 먹으나 한데 모여 있어야지 따로 떨어져 있으니까 영 마음이 불편해서 살 수가 없군요.” 미시스 ‘황’의 음성이 축축이 젖어왔다. 


 “그래도 공부라도 하려면 애가 없는 게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숙’이 반문했다.


 “아이가 아주 없음 몰라도 하나라도 있으면 여자가 직장가지면 무엇합니까? 그저 극성을 부리는 거지요. 애나 집안일은 물론이고 자기한테도 좋은 것 하나 없을 거예요. 웬만큼 남편이 벌어다 주는 걸로 알뜰하게 사는 게 제일이지요.”


 여기가 미국이라는 것을 잊을 정도로 미시스 ‘황’은 꼭 한국의 마음 좋고 상냥한 아주머니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잔뜩 남은 음식으로 저녁까지 먹은 일행이 집에 돌아 올 때쯤에는 거리에 벌써 가로등이 들어와 있었다. 


 “덕분에 오랜만에 우리가 즐거운 하루를 보냈군요.” 닥터 ‘황’은 ‘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전화번호를 적어 가지고 돌아갔다. 


 “예끼 놈.” 장난스런 미소를 잔뜩 담고 두 팔을 활짝 벌려 ‘영’을 번쩍 들어 올렸다. “뭐? ‘스테이션 웨 곤’에 싣고 왔다 구? 복숭아장군이?” 하하하하


 세 식구는 모처럼만에 유쾌하게 밤하늘을 우러러 웃음을 날렸다. 그 하늘에도 별은 여전히 빈틈없이 깔려서 빛나고 있었다. 


 시간은 빨리도 지나갔다. 별로 한 일도 없는데 종일 서성이다보면 시간은 끝도 없이 휙휙 스치고 사라져갔다. 


 그 사이 리빙룸에는 러그도 깔았고 긴 소파도 갖다 놓았다. 미시스 ‘비숍’이 커튼도 쳐주고 9인치짜리 작은 TV도 생겼다. 나무상자를 고여서 테이블도 만들고, 큰 박스를 상보로 씌운 탁자 위에 전화도 갖추었으니 그런대로 피난민 같은 생활이 별로 불편하지 않게 지탱되어 갔다.


 제대로 새것으로 장만하려면 감히 생심도 못할 만큼 엄청난 돈이 들 것인데 기왕에 살 바에는 쓰던 것은 사고 싶지 않았다. ‘훈’의 성격으로는 어느 날 새것으로 살 수 있기 전까지는 오히려 이런 대로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 할 것이다. 


 “그런 건 사서 뭘 해. 생전 여기서 살 것도 아닌데. 소파나 의자는 다 남을 위해 준비하는 건데 필요한 것만 구비했으면 됐지.” 변명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 달에 400달러 수입. 가족초청은 비행기 표가 첨부되어야만 수속할 수 있었기 때문에 ‘숙’과 ‘영’의 비행기 표는 대여여비로 구입해서 아직도 적지 않은 부분이 남아있었다. 


 5개월간의 저축도 짐작이 갔다. 외화지참을 극도로 제한하던 때라 주머니엔 어머니가 주신 50불이 전부였다.

교실에서 여러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어쩔 뻔 했는가. 이 정도 차린 것도 감지덕지 할 일이다. 그런데도 이 피난민 같은 생활이 우울하기만 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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