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nghokim
김종호
부동산캐나다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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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가고 겨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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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이 열리기 시작하면서 비가 내린다. 아니 밤새 내리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며칠째 끝이 없이 내리더니 오후에는 눈과 바람으로 바뀌었다. 철 따라 시시때때로 변하는 주위 풍경들과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세월의 때가 끼어 무디어진 감성들이 깨어나는 순간이 되기도 한다. 


풍요로웠던 생명들을 떠나 보내고 난 뒤의 텅 비어버린 들녘, 추수가 끝난 빈 들판은 허허롭기 그지없고 길가에 서있는 나목들은 안쓰러울 만큼 남루해 보이고 있다. 그런데 지금 메마른 땅 위에 모든 것들 위로 새 생명을 불어넣기 위한 빗물과 눈의 향연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자연의 섭리는 순리를 거스르는 법이 없다. 가을의 끝자락인 지금은 계절의 순환에 따라 겨울이 올 준비가 시작되고 있는 때이다. 눈이 내리는 중에도 아내는 서둘러서 텃밭에 마늘을 심고 얼지 않게 마른 풀로 덮었다. 비가 오다가 눈이 되기도 하고 눈이 다시 비로 변하는 11월은 늦가을과 초겨울이 만나는 그 언저리 어디쯤이다. 가을의 끝이기도 하지만 입동 절기가 든 초겨울이 시작하는 달이다.


기러기와 철새들이 날아오고 또 날아가는 계절, 초록이 바래버린 덤불에서 작은 열매들이 마지막 햇볕을 즐기고 있을 때, 새들은 높이 날아 멀리 길을 떠난다. 떠나는 것이 어디 철새들만이겠는가. 11월이 되면 마음이 먼저 길을 떠난다. 이제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 연례행사처럼 따뜻한 남쪽 나라로 겨울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여름내 분별 없이 늘어놓았던 헛된 약속들은 모두 낙엽과 함께 떨어져 버리고 감정의 겉치레들도 하나씩 떨어 버리고 연민과 미련 같은 것조차 조용히 떨어 버리고, 그리고 조금씩 가벼워져야 한다. 석양을 등지고 서 있는 하얀 갈대의 저 가벼운 몸짓처럼, 구름이 가벼워지고 그 위를 날아가는 철새들의 깃털이 가벼워지고 그리고 우리도 가벼워진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들판이나 숲 속을 달리다가 갑자기 멈춰 서서 온 길을 뒤돌아본다고 하는데, 자신의 가는 속도에 맞추어 영혼이 따라오는지 살피기 위해서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매일 매일 정신 없이 보내는 경우가 많은데 일상생활을 뒤돌아보자. 계절이 송년을 향해 달리고 있는데, 모두들 분주하게 세상을 살고 있지만 이제는 여유를 누리며 살며시 영혼의 빛깔에 다가서 보자.


가로수 길에 떨어진 낙엽들은 갈색 톤의 수채화를 그려놓은 것 같다. 발에 밟힌 잎들은 아무렇게나 흩어져있어도 보기에 추하지 않다. 이 무렵이 되면 시간의 속도감을 실감하게 되니 나이 든 사람들을 서글픈 감상에 젖게도 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심리적 쇠락 감은 영혼이나 육신의 건강 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세월의 흐름 따라 함께 흘러가지 않을 이가 어디 있을까.


시간의 흐름에 의해서 세상의 무엇이라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우주의 질서와 섭리다. 그렇다면 빠른 세월을 안타까워하는 애상적인 마음에서 벗어나는 것이 정신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여기까지 살아오는 동안 개인이나 사회에 흠집 내는 어떠한 범죄에도 휩쓸리지 않아 평탄하고도 상스럽지 않은 일생을 보내게 된 것에 감사한다.


11월은 초겨울의 을씨년스러움이 옷깃을 여미게 하지만 적당하게 따뜻한 거실에 앉아 내외간이 주고받는 은근한 이야기로 열기를 나누기도 한다. 추수 끝난 빈 밭에 초겨울의 무서리가 내리고 가로수의 잎들이 삭풍에 떨어져 땅에 굴러 쓸쓸함을 느끼게 될지라도 앙상한 빈 가지에 반짝이는 햇살이 있어 좋다.


내가 앉아있는 거실 유리창 밖에 석양이 붉게 물든다. 이 자리에 앉아 나는 책을 읽기도 하지만 차를 마시면서 무념무상의 경지에 들 때가 많다. 햇살을 받으면서 해야 할 무슨 다급한 일이 있으랴. 거실 유리문으로 저녁노을이 밀려오고 따끈한 차 한 잔의 정취가 향기롭다. 


“11월은 돌아가기에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버리기에는 차마 아까운 시간”이라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이 세상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 나무가 되고, 서로 찡그리며 사는 이 세상 혼자서도 웃음 짓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꽃잎이 피고 지고 또 피고, 사랑이 오고 가고 또 오고, 사람이 살고 지고 또 살고, 또 계절도 오고 가고--- 가없는 세상이다. 앙상한 가지마다 바람이 이는 겨울이 오기 전에, 삼라만상이 툭툭 떨어지는 이 가을날, 내 마음에는 그렇게 가을은 가고 겨울이 한 발 두 발 다가서고 있다. (201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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