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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혜기

부동산캐나다 칼럼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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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 함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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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갈수록 단정지어 말할 수 있는 일이 자꾸만 줄어든다. 나쁜 사람과 좋은 사람을 갈라놓는 것도, 누가 옳고 그르다고 단정짓는 것도 점점 그 폭이 줄어들고 있다.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는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한 새삼스러운 깨달음 때문이다. 다만 최선(Best)이냐 아니면 차선(Better)이냐, 또는 가장 나쁜것(Worst)이냐 아니면 좀 나쁜것(Worse)이냐라고 생각하게 될 경우가 더 많아질 뿐이다.


 어느 철학자가 말한 것처럼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자신을 아는 것이며 가장 쉬운 것은 남을 비난하는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에서 내 눈의 대들보는 보지 않고 남의 눈에 티만 본다고 경고함을 되새김질 해본다.
 나는 몇 년 전에 잊혀지지 않는 영화 한편을 보았다. 인근 영화관에서 니콜라스 스팍스(Nicholas Sparks)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The Last Song’ 이 그것이다. 


 미움과 사랑, 그리고 용서와 회복의 이야기가 가슴 찡하게 해준다. 부모의 이혼, 그로 인한 아이들의 상처, 특히 아버지를 증오하는 17살 난 딸과 아버지와의 관계 회복을 위한 아버지의 처절한 사랑이 감동스럽게 다가온다. 


 피아니스트였고 교사였던 아버지는 무한한 인내심을 가지고 딸에게 모자란 부모의 불완전성과 잘못을 저저를 수 있다는 부모의 약한 점을 이해시키려 노력한다. 그간 거칠게 아버지를 거부하던 딸은 남자친구를 사귀면서 사랑에 눈을 뜨게 되고 이를 지켜보고 보호해주는 아버지의 모습 속에서 조금씩 아버지에게 다가간다. 


 아버지는 음악이 부녀를 연결시켜 주는 최선의 공통점이라 여기고 딸을 위해 아름다운 피아노곡을 작곡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끝내 딸의 깊은 상처를 회복시키고 암으로 마지막을 맞는 그 자리에서 딸은 자기를 위해 작곡한 피아노곡을 연주하며 아버지께 용서해달라고, 사랑한다고 말한다. 


 인간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자기 생존이며 타인과의 인정 속에서의 공존이며 자기만족을 얻기 위한 충동적인 DNA를 가지고 태어났다. 여기엔 생식의 욕구도 있고 소속감의 욕구에서 사랑과 나눔과 협력을 구가한다. 


 인간은 움직이는 능력 이상으로 자유롭기를 원한다. 어쩌면 인간의 삶은 욕구들 간의 계속적인 갈등과 과정인지 모른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 불완전한 자기 모습 속에서 끝없이 고뇌하고 방황한다.


 나의 화두를 ‘불완전 함에도’란 제목으로 시작한 것도 모자란 것을 모지란 것에 그치지 않고 그로 인해 오는 공해를 최소화 시키며 이를 승화시키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고뇌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나만이 간직한 나의 멘토(mentor)가 있음을 행복하게 여긴다. 


 이런 분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나는 스승을 생각한다. 끊임없이 자기성찰의 여과과정을 거치며 정제된 인품이 아름답게 표출되는 인격과 만나면서 왜소한 인격의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그에겐 철저하게 자신의 불완전성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너그럽게 인생을 껴안는 겸허함이 있다. 더불어 살아가면서 서로를 보완하려는 슬기로움 속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며 겉보다 내실을 가꾸는 침묵을 더 사랑하고 있다. 


 그는 온전치 못한 철저한 인간의 한계성을 인정하기에 모자란 사람과 같이 아주 천천히 걸어가며 대화와 존경심을 잃지 않고 불완전함 속에서도 더불어 온전함을 추구하는 그 효율성을 찾으려는 노력의 모습이 나에게 표본으로 다가오나 뒤뚱거리며 따라가는 데도 숨이 차다. 그럼에도 단상(斷想)을 나누고 싶음은 사랑과 나눔의 속성이 나의 DNA 속에도 들어있는 덕분이겠단 생각을 한다. 


 나 개인의 가슴앓이가 ‘당신’ ‘우리’로 확대되어 나의 화두가 보편적인 고민으로 불완전한 자신을 심각하게 진단해보는 기회로 삼을 길벗들이 그립다. 

 

2014-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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