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soonja
한순자

경기도 여주 출생,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기도 광수중학교 근무, 1992년 캐나다 이민, 캐나다문인협회 수필 부문 입상, 2006년 해외동포문학상, 작품집 <인생에 실패는 없다 다만 또 다른 삶이 있을 뿐이다>, <나이만큼 행복한 여자>, <밀리언 달러 티켓 나도 한장>,<행복이라는 이름의 여행>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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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교 역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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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의 사람들이 은퇴를 앞두고 나름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일들을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우선 떠올리게 된다. 


 난 여행을 좋아하는 그런 성향은 아니지만 그래도 남편이 나보다 먼저 연금신청을 하면 조금은 마음의 여유를 갖고 ‘은퇴여행’을 하고 싶었다. 몇 군데 가보고 싶은 곳이 있기도 했지만, 그보다 남편과 제일 친했던 친구가 살고 있는 시카고엔 가보고 싶어 남편에게 몇 번은 내 심중을 얘기를 했지 싶다. 


하지만 단 며칠간의 여행이라도 가게를 하고 있으니 우리 내외가 같이 짬을 내기란 수월한 일이 아니어서, 시카고 여행은 좀 늦추더라도 드라이브라도 같이 하고 싶었다. 


 긴 여행은 하지 못해도 캐나다에서 단 1박이라도 하고 싶어 광고지를 뒤적이니 버스 편으로 미국을 가는 1박 2일 일정으로 핑거레이크 가는 여행코스가 있었다. 난 남편한테 상의도 하지 않고 나 혼자 가는 걸로 예약을 해놨다. 그렇게라도 해야 강행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래도 남편한테 얘기는 해야 할 것 같아 여행계획에 대해 얘기를 꺼냈더니, 단박에 인상을 ‘팍’ 쓰며 미친 거 아니냐고 했다. 그렇게 험악한 얼굴을 하는 남편을 보니 만 정이 떨어지는 거였다. 


 내가 은퇴여행은 뒤로 미룬다 해도 드라이브나 짧은 여행이라도 갈망했던 것은 거의 몇 년을 남편은 거의 매주 골프를 다니느라 둘이 같이 나가보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봄 햇살이 좋은 날, 여름 맑게 갠 날, 나들이하기에 딱 좋은 날들은 골프 간다고 나가 버리고 어느덧 가을철로 들어서네 싶어지면 참으로 쓸쓸해진다.


 긴 겨울은 자취를 감추었건만 날씨 좋은 날들은 남편이 골프 치러 간다고 미리 나가 버리니, 난 가게에 나가 있으면서 마음을 다스리자 해도 이건 아니다, 정말 아니다 싶었다. 몇 년 있으면 내 나이 70인데 정말 이래도 되나 싶어 그래서 나라도 혼자 여행이라도 가보고자 시도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남편이 정색을 하며 미쳤냐고 까지 하니 도저히 집을 나설 수가 없었다. 그래서 큰딸한테 드라이브라도 가자고 했더니, 가게를 몇 시간 봐줄 테니 아빠하고 가라고 한다. 난 이미 남편 얼굴은 쳐다보고 싶지도 않은 심정이 되어 나와 동행하지 않겠다면 어디든 나 혼자라도 가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딸아이가 같이 가겠다고 해서 큰딸 손녀딸과 같이 방향을 잡아 나섰다. 


 큰딸 내외는 여행 다니는 걸 좋아해서 그 동안 많이 다니기도 했고, 이젠 아이가 있어 자주 다니지는 못해도 지난여름에도 2박3일 캠핑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니 몇 년 동안 바깥바람도 쐬지 못하는 엄마의 심정이 십분 이해되기도, 아빠 혼자만의 골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 엄마, 아빠의 불평등한 일상을 알기에 엄마를 위해 기꺼이 합류한 것임을 너무나 잘 안다. 


 어느 사이 결혼 39년 차 부부로 살고 있다. 교제하던 시절엔 남편 친구들을 같이 만나기도, 얘기를 들어 알고 있기도 했지만 첫 아이를 낳기 전에도 밤늦게 다니거나 몇 번은 친구를 데리고 오기도 해서 미운 마음까지 들던 친구가 있었다. 남편 표현대로라면 둘이 죽고 못 사는 그런 사이라고 했다. 그러니 같이 술을 마시다가 차마 헤어질 수 없어 집으로 같이 왔다고 한다. 


난 그 순간 친구를 데리고 오는 사람이나, 줄레줄레 따라 왔을 그 친구도 못마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곱지 않던 친구가 다시 보이기도 했고, 우정에 담긴 마음을 가슴에 간직해야 되겠네 싶은 계기가 있었다. 


 그것은 큰아이 돌 때였다. 그 즈음 돌잔치에 옷이나 금반지 반돈 정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금반지 한 돈을 해가지고 왔었다. 난 그때 내심 그들의 우정에 감읍했고, 그 동안 마음에서 소홀히 대접했던 내 행위가 못내 부끄럽기도 했었다. 


 큰아이가 네 살, 작은 딸 돌도 되기 전이었다. 남편이 하는 일도 시원치 않아 은근히 걱정이 되었었다. 그런데 그 해 12월에 그 친구와 대리점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남편이 담보 물건을 넣고, 그 친구가 현찰을 대면서 대리점을 시작하게 되었다. 얼마 지나 조금씩 자리가 잡혀갈 무렵, 그 친구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고 했다.


 장사라고 시작해서 그 동안 둘의 사이가 어떠했었는지는 잘 모른다. 다만 내 짐작으로는 친한 친구 사이라 해도 동업은 어렵겠다 판단이 선 것 같았고, 그 친구는 그때까지 결혼을 하지 않았으니 아내와 자식이 둘씩이나 있는 친구가 혼자 하는 것이 낫겠다 싶어 그런 결정을 한 것이 아닐까 싶다. 


둘이 같이 시작했다가 친구는 이민을 간다는 명분을 내세워 그만 두고, 남편이 혼자 대리점을 운영하면서 이민을 오기 전까지 11년을 그 친구 배려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살았다. 


우리가 살면서 어떤 ‘배우자’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삶의 한 축을 이루는 것이라면, ‘무엇’을 하며 살았느냐가 또 다른 축이 될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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