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soonja
한순자

경기도 여주 출생,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기도 광수중학교 근무, 1992년 캐나다 이민, 캐나다문인협회 수필 부문 입상, 2006년 해외동포문학상, 작품집 <인생에 실패는 없다 다만 또 다른 삶이 있을 뿐이다>, <나이만큼 행복한 여자>, <밀리언 달러 티켓 나도 한장>,<행복이라는 이름의 여행>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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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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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 오고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서울엘 나갔었다. 옷정리를 하던 중 남편의 양복주머니가 유난히 불룩해서 슬쩍 들여다봤더니 항공봉투가 들어 있었다. 무심히 빼어보니 내가 남편에게 보낸 편지였다. 날자가 92년인 것을 보니 우리가 캐나다에 오던 해 남편이 서울에 나가 있는 동안 쓴 듯한데 내용을 읽어 내려가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가 남편을 그만큼이나 사랑했었나 싶은 것이 그동안 다 바래지고 엷어진 줄 알았던 우리의 사랑이 몇가지 남편의 따뜻한 배려에 다시 느껴지며 물안개가 솔솔 피어나듯 교제하던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대학교 3학년 때 남편을 만나서 난 이미 남편에게 푹 빠져 있었는가 보다. 제 눈에 안경이라더니 친구들을 만나면 내가 너무 신나게 얘기를 했는지 한 친구가 나중에 하는 얘기가 신성일씨 쯤은 생긴 줄 알았다며 실망하는 것이었다. 


 금방 만나고 들어와서도 미쳐 못다한 얘기가 남았는가 싶어 거울에 붙어 서서 혼자 얘기하고 대답하고 시간 가는 줄 몰랐던 때도 있었다. 그즈음 어느날 집에 찾아갔더니 춘천엘 갔다는 것이다. 대강 시간계산을 해보니 잘하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청량리에 가서 열차를 탔다. 


 춘천역에서 내려 막 개찰구를 빠져나가는데 저만치서 곤색 양복을 입은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지며 그가 바로 그임을 알고는 서로 놀라움과 반가워 어쩔 줄 몰라했다. 


 그 후 결혼을 해서 난 남편이 필요 이상으로 자상하다 싶을 때면 고맙고 사랑이라 여기기보다는 귀찮아 하며 짜증을 낼 때가 더 많았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런 저런 것들이 사랑의 표현방식이 아니었나 싶다. 


 처음 운전을 배워 보름 정도 연수를 받고는 차를 좀 쓰겠다고 하니 안심이 되지 않는다며 남편이 옆자리에 앉으며 나보고 운전을 해보라고 했다. 난 자신 있게 운전대를 잡고는 차선을 바꿔야 하는 지점에서 인도로 올라가고 말았다. 그렇게 경미한 사고가 있고난 다음부터는 운전대를 잡기도 두려워 한동안 운전을 할 수 없었다. 


 그 후 난 이따금씩 생각해봤다. 남편이 그때 나보고 운전을 해보라고 하지 않고, 이내 차를 내주었다면 별일이 없었을까. 내가 차를 좀 쓰려고 했던 것은 그때 내가 작은 딸 유치원 자모회장을 맡고 있었기에 봄소풍을 가면서 그래서 차를 쓰려고 했던 거였다. 그것도 가까운 곳도 아니고 서울에서 과천까지 운전을 하고 가려 했으니 말이다. 그때 남편이 내게 그런 자상한 배려가 없었다면 소풍을 무사히 다녀올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등골이 다 오싹해진다. 


 다시 시내연수를 받고는 거의 2주 정도를 때로는 앞에서, 때로는 뒤에서, 내가 안전하게 차선을 바꿀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건만 잔소리 한다고 짜증이나 냈지 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기억된다. 


 그뿐인가. 처음 안경을 쓰기 얼마 전부터 신문 보는데 지장이 없느냐고 물어볼 때마다 아직 괜찮다며 큰소리를 쳤는데, 언제부터인지 눈만 비벼대고 글씨가 고물고물해서 신문을 앞으로 당겼다 밀었다 조절을 해봐도 헛일이었다. 아니, 벌써 안경을 써야 할 나이가 되었나 싶어지며 퍼뜩 안경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남편이 안경을 스탠드 옆에 놓아둔 것 같았는데 하고 찾아보니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안경을 쓰고 책을 들여다 봤더니 너무 잘 보이는 것이었다. 아, 이 남자가 이제 내가 안경이 필요할 것을 알고 이렇게 미리 준비해 두었구나 싶어 콧등이 시큰했었다. 


 캐나다에 와서 3번째 이사를 하면서 서로 심기가 불편해 있었는데, “식탁보 사러가자” 하기에 시큰둥하니 대답도 않고 따라나서지 않았더니 혼자 나가서 색깔별로 4개와 식탁 유리까지 맞춰 놓고 한국을 나갔다. 그것은 캐나다에 와서 그런 환경 밖에 만들어주지 못해 미안하긴 해도, 그래도 분위기 있게 차도 마시고, 글도 써보고, 자기생각도 잊지 않고 하라는 남편의 마음이었음을 뒤늦게 알고는 이렇게 둔하고 무심한 여자가 또 있을까 미안하기까지 했다. 


 서울에 나가 있으면서 어쩌다 전화해서 보고 싶지 않느냐고 물으면 보고 싶긴 뭐가 보고 싶으냐며 건강해요? 나 아이들과 잘 있으니 걱정말고 일이나 열심히 하라고 퉁명이나 떠니, 지금 생각해도 장작개비가 따로 없네 싶어 미안한 마음이 든다.


 연애 6년 하고 결혼해 사는 동안, 난 남편의 마음, 심정을 얼마나 알고 이해를 하고 있었을까. 새삼 돌아보면, 캐나다에서의 삶은 친구들을 만나지 못하는 외로움보다 딸들이나 내게 좀더 잘해줄 수 없음이 더 큰 외로움 아니었을까 싶다. 


 입이 쑥스러워 미안해요. 고마워요, 라는 말 잘하지 못하는 심통에게(연애할 때 내게 붙여진 별명) 그나마 글이라도 있어 이 마음 전할 수 있음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남편의 건강과 함께 신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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