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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정치는 삶에 대한 책임이다-노삼열(전 토론토대 정신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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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삼열(전 토론토대 정신의학과 교수)

 

 

우리는 국가를 초월한 시민과 생활양식(Transnational citizenship and life style)의 급격한 보편화를 경험하고 있다. 한국과 캐나다를 오가며 동시에 두 나라 살림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또 이제는 미국이나 캐나다 혹은 유럽의 대학 입학을 위한 조기유학의 의미가 뚜렷하지 않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성장하고 교육을 받은 학생들 중 실력을 갖춘 젊은이들은 선진국이라는 곳의 최고의 대학에도 바로 입학할 수 있다.


토론토대학에도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바로 유학 온 학생들이 많고, 모든 교육을 한국대학에서 마친 순수한 ‘한국산’ 교수들도 있다. 과학과 학문의 초국가주의(Transnationalism)의 결과다. 유럽 클래식 음악만이 아니라 팝뮤직(pop music)이나 예술(fine art) 혹은 디자인이나 그래픽 분야에서도 이런 현상을 읽을 수 있다. 


팝뮤직, 영화, 드라마나 연예계의 공동문화시장이 팬아시아(Pan Asia)를 넘어서 유럽과 북미에서 번지기 시작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나는 20년 전만 해도 이런 현상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이런 국제공동체 현상은 문화와 스포츠뿐이 아니요 철학이나 종교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Transnationalism이 확대되면 개체의 특징이 없어지리라는 우려가 있었다. 실제로 세계의 모든 대도시 국제공항에서 시내로 향하는 도로에서 같은 체인식당이나 전자회사나 약광고 등을 보면서 이런 우려의 한 면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transnationalism이 활발하고 지역간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오히려 각 개체의 특징이 더욱 두드러지고 더 상세히 관찰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이는 정보망이 개방되고 투명해지고 교환이 활발해져서 각자의 활동과 행보 그리고 내면의 모습까지 속속들이 알려지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과 캐나다는 이웃이며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물론 캐나다는 이중 국어 정책을 채택하고 있지만), 매우 활발한 경제적 교류만이 아니라 국방과 학문 (학회와 학술대회, 출판 등등), 스포츠와 많은 분야의 문화적 활동을 공동으로 펼치고 있다. 많은 분야의 경우 서로의 자격과 경력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캐나다와 미국의 차이는 완연하다. 정치(정부와 국회)와 사법부 구조가 다르고, 정당체제와 운영도 상이하고, 선거제도 역시 적지 않게 다르다. 무엇보다 국민들을 대하는 정부(국가)의 자세가 크게 달라 보인다. 


상세한 설명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지만, 미국은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한 극단적 자본주의 사회를 선호하여 경쟁을 통한 성장을 추구하며, 이런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한 개인의 권리와 자유에 최상의 가치로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캐나다의 경우 개인의 경쟁을 통한 성장을 꾀하기는 하지만, 국가의 통제를 통해 공동분배의 장점을 살리려는 노력이 뚜렷하다. 사회주의적 건강보험제도와 교육제도가 가장 뚜렷한 제도적 차이의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결과적으로 서민들의 삶의 질을 보장하는 점에는 캐나다가 앞선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국가간의 상이한 모습은 캐나다와 미국의 경우만이 아니다. 유럽에서도 북쪽에 위치한 Scandinavian 국가들과 중남 그리고 동부 유럽의 경우가 그렇게 상이하다.


이와 같은 현상은 한 국가 안에서도 발견된다. 캐나다의 경우, 비유럽계인들에게 이민을 허용한 것이 불과 반세기 전이어서, 캐나다 태생 두 세대가(two generations of Canadian born)가 마무리 되지 않은 상태이지만, 이미 민족간 사회경제적 성취수준에 뚜렷한 차이(ethnic diversities in socioeconomic level)가 있다. 


대학과 병원의 복도와 벽에 전시되어 있는 후원금 기부자의 명단을 보고 있노라면 지난 20-30년 사이 중국인과 인도 그리고 중동계 이름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최근에는 남아시아계(south Asian)의 정치와 언론계 진출이 두드러지는 듯하다.


 한국계 이민자들의 경우, 특유의 교육열에 힘입어 2세들의 전문직 진출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각 전문적 분야에서 리더 서클(leaders’ circle)에 진입하기에는 조금 더 노력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이 노력은 자신이 처한 사적 경험과 상황(personal experiences)을 사회적 과정(social process)의 일부로 이해하려는 사회학적 관점(sociological perspective)을 기본으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관점의 전환은 곧 나의 노력의 초점을 개인적 능력과 효능(personal competence and efficacy)에서 시작하여 사회적 구조와 구조적 변화과정(social structure and structural change)으로 옮겨가는 작업에서 시작된다. 각 개인의 노력의 결과는 후자의 개방성과 형평성 효과에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좁게 보면 개인의 노력과 능력의 효율이 사회적 자본과 연결망(social capital and network)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한 개인이나 단체가 사회학적 관점을 실천하는 지름길이며 가장 기본적 활동은 정치에 동참하는 일이다. 정치는 곧 우리의 삶이다. 그래서 정치에 무관할 수 없는 것이다.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자신과 가족에 대해 무책임한 말은 없다. 그래서 종교 역시 우리의 삶에 관한 것이기에 정치와 결별한 사태로 유지되어서는 안 된다. 


정치가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우리의 정치 참여는 나의 삶에 대한 절실함에 근거하며 그래야만 진실된 정치활동을 할 수 있게 된다. 삶의 절심함은 곧 내가 확신하며 지키고 싶은 어떤 ‘가치’에서 출발하게 마련이다. 정치는 철학적 사고와 신념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때로는 Rosa Parks와 같이 가장 기본적 인권의 가치를 위한 것일 수 있고, 국가와 민족간의 평화를 위한 것일 수도 있다. 나아가 구체적 정치제도나 선거과정이나 국가경제정책과 같은 더욱 구체적 신념이 정치참여의 동기가 될 수 있다. 


한가지 분명한 점은 뚜렷하고 맑은 정치철학이 부재된 참여는 기회주의적 정치인을 낳게 되고 그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급기야는 사회와 개인들의 삶의 질을 해치고 말 것이다. 우리가 고국을 떠나 낯선 곳에서 소수민(minority)의 삶을 각오하게 된 까닭도 이런 기회주의적 정치인들의 망동의 피해로 인한 것이라고 말하면 무리일까?


 정치참여는 자신의 상황과 철학에 근거한 것이기에 자신과 같은 경험과 상황을 나누고 있는 자들의 집단적 활동일 것이다. 소수민 이민(minority ethnic immigrants)의 경우 자신들을 대표하는 리더(community leader)의 정치입문으로 시작하는 것이 보편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물론 리더가 제시한 정책과 정당을 기본으로 후원을 결정하는 것 역시 매우 성숙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자신과 역사적 경험과 실존적 상황(historical experiences and existential contexts)을 공유하는 후보를 지원하는 것 역시 정책과 정당과 동등한 판단의 축(axis)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3개월 여를 남겨둔 온타리오 총선을 앞두고 이 글을 기고를 하는 의도를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현격한 Transnational 시대에 사는 우리의 삶은 속속들이 들어나 남에게 보고된다. 


 동계올림픽을 통해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시기에, 타인들이 한국이민자들을 보기에 지혜롭고,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가족과 사회에 대해 책임감이 뛰어난 민족임을 발견하기 바라며, 어려운 결정과 지대한 노력을 이어가는 두 코리안 캐네디언(two Korean Canadian candidates)에게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노장의 투혼과 첫 도전에 임한 2세의 기개를 후원한다. (2018,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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