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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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착한 사마리아인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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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나?’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이오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그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거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되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눅 10: 25-37)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제일 많이 알려졌을 뿐 아니라 인종과 종교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고 받아드려 실천해야 할 삶의 교훈을 들려주는 비유다. 하지만 이 비유는 예수께서 특별한 행사에 참석하셔서 많은 사람들을 위해 들려주신 것이 아니라 한 율법학자의 질문에 답하시면서 들려주신 것이다.


어떤 율법학자가 예수님에게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 묻는다. 영생에 이르는 길을 알기 위한 진지한 의도 아닌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질문이었다.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느냐?” 되물으신다. 직접 답변하지 않으시고 그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습니다.”라 답한다. 이렇게 대답하면서 그 율법학자는 예수님을 시험하려 했던 그의 의도와는 달리 예수에게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겼다고 느낀다. 때문에 “네 말이 옳다. 그대로 행하면 네가 살 것이다.”란 예수님의 칭찬을 동반한 지시를 받는 즉시 “그러면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 다시 묻는다. 수세에 몰린 입장에서 벗어나기 위한 질문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의 삶의 중심은 자기 자신이었다. 그 주위에 가족들과 친척과 친구들이 있었고, 그 다음에 정통적인 유대인의 피가 흐르는 동족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이처럼 혈통과 민족주의를 중요시하는 유대인들에겐 “이웃”의 범위가 지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율법학자는 사랑해야 할 대상인 “이웃”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를 묻는 도전적인 질문을 한 것이다. 이때 예수께서 들려주신 것이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 강도를 만난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27키로 정도 떨어진 곳으로, 예루살렘은 해면보다 950미터 높고, 여리고는 250미터 낮은 관계로 두 곳의 높고 낮은 차이는 1,200미터나 된다. 따라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비탈지고 구불구불하며, 중간에 바위와 동굴들이 많아서 강도들이 숨어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강탈하는 일이 잦았다.


그런 위험한 길을 혼자 가는 그 사람을 강도들이 덮쳐 옷을 벗기고 가진 것을 모두 빼앗고 때려서 거의 죽게 만들고 가버렸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을 지나다 그를 보았으나 그대로 가버린다. 얼마 후 한 레위인이 지나갔지만 그도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하고 자기 갈 길을 간다. 


세 번째로 그 곳을 통과하던 사마리아 사람은 피투성이가 되어 누워있는 사람을 보는 순간 달려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응급조치를 한 후 나귀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정성껏 돌보아 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처럼 위험을 무릅쓰고 목숨이 경각에 달린 이를 구한 사람이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종교계의 지도자 아닌 일반인이었음은 물론 “사마리아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상종하기조차 꺼렸다. 그만큼 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멸시하고 적대시했다.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시면서 사마리아를 피해가지 않고 그 곳을 통과하다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한 것은 예수님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형성된 장벽을 허물었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큰 것이다.


 그런 시대적 상황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이 외면하고 지나친 강도 당한 사람에게 사마리아인이 사랑의 손길을 펼친 것이다. 이 비유를 말씀하심에 있어 예수님은 제사장과 레위인의 처사에 관해 한 마디로 언급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이 율법학자에게 이 비유를 들려주신 목적이 두 사람의 위선적인 삶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그들과 그들의 증오의 대상인 사마리아 사람이 행한 일의 근본적인 차이를 깨닫게 하기 위함에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율법학자에게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 사람 중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 이겠느냐?” 물으심으로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란 그의 질문에 그 자신이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라 대답하게 한 것이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은 다섯이다. 강도 당한 사람,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 사람, 주막집 주인이 그들이다. 강도 만난 사람은 여러 차례 언급되지만 그의 신분에 대하여는 알 길이 없다. 제사장, 레위인, 그리고 주막집 주인도 이 비유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별것 아니다. 이 비유의 주인공은 선을 행한 사마리아 사람이다. 


그렇다고 사마리아 사람들이 모두 착하고 의로운 것은 아니다. 유대인들이 그들을 미워한 것처럼 그들도 유대인들을 증오하며 적대행위를 해온 그들이다. 그러나 이 비유에 나오는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한 인간에게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사랑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는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의 신원 같은 것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죽을 수밖에 없는 한 생명을 보는 순간 그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타고 가던 나귀에서 뛰어내려 그에게 달려가 응급치료를 한 후 주막으로 데리고 간 것이다. 그리고는 거기서 밤새 그를 돌보며 간호한 후 이튿날 아침 떠나면서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며 계속하여 그를 치료해 달라고 부탁까지 한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지불하겠다면서 말이다. 주인에게 그런 부탁을 한 것을 보면 사마리아 사람은 그 곳을 지날 때마다 그 주막에 들렀기에 주인과 친밀하며 서로 믿고 신뢰하는 사이였던 것 같다.


이미 언급한대로 그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이웃”의 범위는 상당히 좁았다. 가족과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 그리고 그들 주위에 유대인의 혈통을 지닌 극소수의 사람들만을 그들의 이웃으로 간주했던 그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사장과 레위인에게는 피 흘리며 길가에 누워있는 신원조차 알 수 없는 사람은 이웃의 범주에 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마19:19; 막 12:31)하신 이웃 속에는 “원수”까지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 산상수훈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마 5:44; 눅 6:27)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 물으면서 율법학자는 자기가 알고 있는 “이웃”과 예수님의 “이웃”의 차이에 관해 토론할 의도를 가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수께서 “세 사람 중 누가 죽어가던 사람의 이웃이냐?” 물으시자 “선을 행한 사람입니다.”라 말할 수밖에 없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이웃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그가 강도에게 습격 당하여 죽게 된 사람을 구하기 위해 한 모든 일들은 보상을 바라거나, 선행을 인정받거나, 자신의 의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한 일은 철두철미 이웃을 돕기 위한 “사랑의 수고”였다.


예수님이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들려주신 후 2,000여 년이 지났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이 이야기는 시대와 민족과 국가를 초월하여 인생의 황금률로 통용되었다. “이웃사랑”은 믿는 자들만이 행해야 할 예수님의 명령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지켜야 할 인간의 기본의무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걷는 인생길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가파르고, 좁고, 위험한 길보다 더 험난하고 위험하다. 그 길 도처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갖가지 인생의 문제로 낭패하고 쓰러져 신음하는 사람들이 늘어만 가는 가슴 아프고 슬픈 현상이 늘어만 가고 있다. 우리 모두는 그들에게 “착한 사마리아인”으로 다가가야 할 사명을 지니고 있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뗄 수 없는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한다고는 말 할 수 없지만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면 그것이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나타나야 하는 까닭이다. 누구보다 율법을 잘 알고, 가르치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말로만 이웃을 사랑했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행동으로 이웃을 사랑했다.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 보다는 “우리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셨다고 믿고 싶다. 율법학자에게 “너도 가서 그와 같이 실천하라.”하신 말씀이 그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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