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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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배은망덕한 신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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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이에 주인이 그들을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3:21_35)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가 넘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그는 공의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라는 두 속성을 지니고 계시기에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들이 구원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것이다. ‘죄의 값은 사망’이란 하나님의 공의는 결코 변하지 않지만 사랑의 하나님이 베푸시는 용서로 인해 인간들은 죄 사함을 받고 천성으로 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몇 번이나 용서해 주시며, 인간은 서로의 허물과 잘못을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하는 것일까?


베드로도 이 문제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어느 날 여러 사람들 앞에서 “주여, 형제의 죄를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라 물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베드로는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라고 자기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버린 것이다. 그 당시 랍비들은 다른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면 세 번까지는 용서해 주라고 가르쳤다. 


 베드로는 이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세 번의 두 배에다 한 번을 더 보태서 “일곱 번까지 용서해주면 되지 않겠습니까?”라 말씀드린 것이다. 예수께서 넓은 아량을 가졌다고 칭찬해 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예수님의 답변은 베드로를 실망시키고 부끄럽게 했음에 틀림없다. 예수님은 “일곱 번만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답하셨기 때문이다. 수학적으로 계산하면 490번을 용서하라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용서의 횟수’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용서의 정신’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어서 들려주시는 ‘배은망덕한 신하 비유’를 통해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비유는 “하늘나라는 그 종들과 결산을 하려는 어떤 임금과 같다.”로 시작된다. 결산이 시작되면서 만 달란트를 빚진 신하가 임금 앞에 선다. 만 달란트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게 큰 액수다. 역사가 죠세프스에 의하면 그때 헤롯 왕이 통치하던 유대의 일 년 예산이 900 달란트였다. 


여기 근거하면 그 신하가 임금에게 진 빚은 유대왕국의 11년 예산과 같은 엄청난 금액이며, 오늘 날의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10억 달러가 넘는 천문학적 숫자에 이르는 돈이었다. 이처럼 막대한 돈을 그 신하가 무슨 목적으로 임금에게서 빌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능력으로는 갚을 수 없는 큰 규모의 빚이었다.


임금이 신하에게 아내와 자식들과 그가 가진 모든 것들을 팔아 빚을 갚으라고 하자 그는 반드시 갚겠으니 조금만 참아달라고 애원한다. 임금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매달린 것이다. 그의 처지를 불쌍히 여긴 임금은 빚 전액을 면제해 주었다. 


일급 살인혐의로 기소되어 법정에 선 죄수에게 무죄가 선고된 것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전혀 기대할 수 없었던 놀라운 혜택을 입은 신하는 기뻐 날뛰며 궁궐을 떠난다. 그런데 대궐 문을 나서면서 신하는 그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을 만난다. 그 순간 그는 그 사람의 목을 붙잡고 빚을 갚으라고 윽박지른다.


가련한 채무자는 그 앞에 엎드려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사정한다. 그러나 신하는 임금에게서 받은 크나큰 혜택은 깨끗이 잊어버린 듯이 일언지하에 채무자의 간청을 묵살하고 그를 옥에 가두어 버린다. 


여기서 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의 가치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미 언급한 대로 만 달란트를 신하가 갚기에는 너무도 큰 돈 이었다. 그러나 백 데나리온은 일반 서민의 100일 벌이에 해당하는 큰돈이기는 했지만 만 달란트의 오십만 분의 일 밖에 안 되는 금액이었다. 


그 신하는 이처럼 그가 탕감 받은 만 달란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적은 액수의 빚을 진 사람의 딱한 사정을 외면하고 가련한 사람을 감옥에 보낸 것이다. 이를 본 신하의 동료들은 분개하여 이 사실을 임금에게 보고한다. 자초지종을 들은 임금도 진노하여 그 신하를 다시 불러 그의 매정함을 꾸짖고 만 달란트를 다 갚을 때까지 그를 투옥시키라고 명한다. 


이 비유에는 용서를 몇 번까지 할 것인가에 대한 언급이나 암시는 없다. 어떻게 용서를 할 것인가에 관해서만 말해 줄 뿐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려운 이웃에게 돈을 빌려주면 이자를 받지 말 것은 물론 빚 독촉을 하지 말며, 옷을 저당 잡았을 때도 자기 전에 옷을 돌려보내라고 하셨다.(출 22:25_27) 


뿐만 아니라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 50년이 되는 해를 희년으로 정하고 그 해에는 모든 채무를 면제하고 노예들까지 해방시키도록 하셨다.(레 25: 8-10)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자비와 정의’는 병행되어야 함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만 달란트 빚을 면제받은 신하가 그에게서 백 데나리온 빌려간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 생각조차 안하고 엄격하게 법을 집행한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임금은 문제의 신하를 불러 ‘악한 자’라 질책하며 탕감해 주었던 빚을 다 갚으라고 명한 것이다.


‘배은망덕한 신하 비유’는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그와 같이 하실 것이라.”로 끝난다. 이 끝맺는 말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가 어떤 것인지 또 우리가 어째서 서로를 용서해야 하는 가를 깨달을 수 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마음을 지닌”(렘 17:9) 것이 인간이다. 


이런 인간의 죄악상을 사도 바울은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려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이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 3:13_18)라 들려준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따라 처벌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며, 우리를 그의 사랑의 품 안에 안아주신다.(시 103: 8,14)


이사야 선지자는 이 사실을 “여호와께서는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게 하시며, 진홍 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하실 것이라.”(사 1:18) 말해준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발로 밟으시고, 깊은 바다에 던지셔서”(미 7:19) “기억조차 하지 않으시는 분”(사 43:25)이시다.


임금이 그의 신하가 진 만 달란트 빚을 면제해 주는 자비를 베푼 것은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의 죄에 대해 사형을 선고하지 않으시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보내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주신 것을 뜻한다. 


이제 그 놀라운 자비를 입은 우리가 할 일은 구원받은 기쁨을 우리만이 누릴 것이 아니라 아직도 죄의 빚을 갚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우리의 빚을 대신 갚아 주신 사랑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그러지 못하고 우리를 섭섭하게 하고, 억울하게 하며, 우리에게 부당하고 잘못된 일을 행하는 이웃에게 당하는 대로 갚으며, 때로는 그 이상으로 그들을 괴롭힌다면 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고도 그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을 옥에 가둔 배은망덕한 신하 같이 사람들에게 지탄 받고,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비참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고별설교를 하시면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서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하신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이 예수께서 일러주신 진정한 용서의 정신을 지니고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배은망덕한 신하 비유’가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로 끝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줄 안다.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느니라.”(야 2:13)는 예수님의 사랑의 권고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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