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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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기적-벳새다에서 맹인을 고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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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내느냐 물으시니,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하시니라.(막 8:22-26)

 

예수님은 데가볼리 광야에서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어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신 후 몇 곳을 경유하여 벳새다에 당도하신다. 벳새다는 빌립과 안드레와 베드로의 출신지로서 요단 강 동편 갈릴리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예수님이 그곳에 오시자 사람들이 맹인 한 명을 데리고 와서 그에게 안수해 달라고 청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맹인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나가신다. 예수께서는 데가볼리서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고치실 때도 사람들 없는 곳으로 데리고 가셨다.(막 7:33)


마가복음에만 기록된 이 두 기적은 예수께서 병자들을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고쳐주셨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렇게 하신 까닭은 다르다. 데가볼리에서는 귀 먹고 말 못하는 사람을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 세우게 되면 그가 난처해질 수도 있고, 군중들이 예수님을 단지 기적을 행하시는 능력을 지닌 분으로만 인식할 수도 있겠기에 그렇게 하신 것이었다. 


그러나 벳새다에서 예수님이 맹인을 데리고 마을 밖으로 나가신 것은 그곳 주민들에게 그의 권능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는 것을 보며 그가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줄 정치적인 메시아로 생각했다. 벳새다 사람들은 그 정도가 더 심해서 예수님의 권능이 하늘로부터 오는 것임을 믿지 않았을뿐더러 주님을 배척하기까지 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었으며”(막 6:5), “화 있을 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마 11:21)라고까지 말씀하신 바 있다. 그런 불신앙의 사람들 앞에서 그의 권능을 행하고 싶지 않으셨던 예수님은 맹인을 데리고 마을을 벗어나 그의 눈에 침을 뱉고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신다.


예수께서 침으로 맹인의 눈을 뜨게 하고, 벙어리의 입을 연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침에 병을 고치는 효능이 있다고 믿고 있었던 당시 사람들에게 낫는다는 확신을 주기 위해 이 방법을 여러 번 사용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는 예수께서 침을 뱉어 병자를 고치신 것에 무언가 거부감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런 이들은 예수께서 권능을 행하실 때 사용하는 방법은 그의 선택이지 우리가 관여할 문제가 아님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 맹인의 눈에 손을 대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신 것은 의사가 개안수술을 받은 환자의 눈에서 붕대를 풀면서 “뭐가 좀 보입니까?”라 묻은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질문이었다. “물체를 볼 수 있느냐?”의 여부가 아닌 “무엇을 볼 수 있느냐?”를 물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의미 깊은 물음에 맹인은 “네, 사람들이 보이긴 합니다만 나무가 걸어 다니는 것 같습니다.”라 답한다. 이 말을 들으면 그가 태어날 때부터 맹인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나무처럼 보인다는 대답은 그가 사람과 나무를 전에 본 적이 있다는 말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언제부터 보지 못하였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시야에 들어온 사람이 나무처럼 인식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눈을 뜨기는 했어도 사물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인체의 모든 기관들이 하나 같이 귀하지만 눈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것이 없다. 올바로 보아야 제대로 판단할 수 있고, 제대로 판단해야 바르고 보람되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밝은 눈으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그가 원하는 것만 보았기에 비참하게 살다 가버린 사람 중의 하나가 롯이다. 롯은 아버지 하란이 세상을 일찍 떠난 후부터 그를 친자식처럼 돌보아준 삼촌 아브라함이 서로의 양떼를 잘 돌보기 위해 갈라설 것을 제의하며 그가 갈 곳을 먼저 선택하라고 하자 요단강 동편을 택한다. 그 지역에 가축을 키우는데 필수조건인 물이 풍부하고 풀이 많이 자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 롯이 본 것은 요단 동쪽에 펼쳐진 넓고 푸른 초원이었지 그 너머에 있는 죄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는 보지 못했던 것이다.(창 13:13)

 

그 결과 롯은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실 때 그곳을 무사히 빠져 나오기는 하지만 두 딸과 근친상간의 부끄러운 죄를 범하게 되고, 그들의 자손이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되어 이스라엘을 대적했으며, 오늘 날까지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중동위기의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구한말 흥선 대원군의 짧은 안목은 당시의 국제정세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그가 실시한 쇄국정책은 조선 왕조를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들었고, 그로 인해 국권을 일본에게 박탈당하는 민족의 비극까지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못 본 척 하거나 필요한 것들만 골라서 보는 안목의 소유자들은 실패하는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와 같은 시야를 지닌 인물이 지도자가 되면 그가 속한 단체나 사회나 국가가 불행해 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올바로 볼 수 없다면 차라리 보지 못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눈 뜬 맹인이 보기는 하되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을 확인한 예수님은 맹인의 눈을 두 번째로 안수하신다. 그때까지 예수께서 행하신 권능으로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은 단번에 완벽하게 회복되었다. 맹인이 즉시 앞을 보게 되었고, 귀머거리와 벙어리가 그 자리에서 듣고 말하게 되었으며, 중풍병자나 나병환자가 단번에 온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죽었던 회당장의 딸과 무덤에 누웠던 나사로까지 예수님의 말씀이 끝나면서 살아났다. 그런데 어째서 벳새다 맹인에게는 예수님이 두 번씩이나 안수를 해야만 했을까? 그 까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인간도 하늘의 깊고 오묘한 진리를 단번에 다 깨달을 수는 없다는 사실부터 알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영생을 누리며 사는 복된 신분으로 변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부터 천국의 비밀을 낱낱이 알게 되고,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며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릴 수 있는 믿음과 능력으로 충만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 지경에 이르려면 그리스도를 아는 은혜와 진리 가운데 매일매일 자라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께서 그 사람의 눈에 두 번째로 손을 대신 것은 보기는 보되 사람을 나무로 잘못 보는 그의 눈이 올바로 보고 바르게 깨닫고 판단할 수 있게 해주기 위함이셨다. 예수님의 권능의 손길이 그의 눈에 두 번째로 닫는 순간 그는 사물을 똑똑하고 확실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경우 벳새다 맹인이 처음 가졌던 불완전한 시력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판단하며 살아간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아닌 우리에게 필요한 것만 바라보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의 입장이나 처지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이 우리가 갖고 싶은 것들만을 획득하려는 것이 우리의 시야일 때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이런 안목을 지니고 있는 한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도 없고, 따라서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할 능력도 배양할 수 없다. 


시리아 왕이 선지자 엘리사를 죽이기 위해 그가 있는 도단 성에 포위하자, 이를 알게 된 사환이 혼비백산하여 엘리사에게 그 사실을 고한다. 그러나 엘리사의 기도로 눈이 열린 사환은 시리아 군보다 몇 배나 많은 불말과 불수레가 엘리사를 보호하는 있는 것을 보고 안심한다(열하 6:14-17).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우리의 눈을 밝혀주시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놀라운 계획과 축복을 볼 수 있게 된다.


두 번 안수를 받고 그 사람의 시력이 완전히 회복되자 예수님은 그를 집으로 보내시며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이르신다. 예수님은 어째서 그런 분부를 하셨을까? 마을로 가지 말라 하신 첫 번째 이유는 그의 권능을 믿지 않고, 그를 배척하는 벳새다 사람들에게 그가 행하신 기적을 알리고 싶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된 맹인이 벳새다의 암흑 속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예수님은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베들레헴 마구간에 누우신 아기 예수께 경배한 동방의 박사들에게 그들이 왔던 길 아닌 다른 길로 되돌아가게 하신 것처럼(마 2:1-11), 예수님은 눈 뜬 맹인이 어둠이 없는 광명한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무죄 방면 하시면서 예수께서 그녀에게 “가서 다시는 죄의 길을 가지 말라.”(요 8:11)하신 사실이 이를 확인시켜주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기 전 우리는 모두 벳새다의 맹인 같은 존재였다. 그러다 예수님을 만나 그 암흑의 세계를 벗어나 광명한 세상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시계는 아직도 희미하고 불안전하기만 하다. 우리의 불완전한 시력을 완전하게 해달라고 계속하여 기도해야 할 줄 안다.


나만을 보지 말고 이웃들을 보살피며,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바라보며, 육안으로 볼 없는 하나님을 마음의 눈으로 선명하게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런 눈을 가져야만 “현재의 고난”넘어 존재하는 “찬란한 영광의 세계”를 바라보며 힘차게 나갈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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