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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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기적-게네사렛에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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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그곳 사람들이 예수이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다만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느니라.”(마 14: 34-36)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채로 메고 나아오니, 아무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느니라.”(막 6:53-56)


예수께서 게네사렛 자방에서 병자들을 고치신 사실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만 간략하게 수록되어 있다. 마태복음에는 더 간단하게 “병자들이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게 해달라고 간청하여 옷자락을 만진 사람들은 모두 나았다.”라고 만 적혀있다. 때문에 게네사렛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권능은 중요하지도 않고, 특별한 의미도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게네사렛에서 일어난 일은 예수께서 행하신 다른 모든 기적들처럼 그가 누구신가를 나타내심과 동시에 인간을 향한 그의 사랑과 자비가 얼마나 큰 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짧게 기록된 이 기적 속에는 다른 기적들로부터는 찾아볼 수 없는 심오한 의미와 중대한 인생의 교훈까지 담겨있다. 


게네사렛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만 나오는 지명으로서 갈릴리 호수 서북편에 위치한 평원지대다. 넓지는 않지만 땅이 비옥하고 천연조건도 좋아서 여러 종류의 과일들 특히 포도와 무화과를 재배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보통 한 지역에서 종류가 다른 과일나무들을 같이 재배하기가 쉽지 않은 법인데, 이 곳에서는 갖가지 과일들을 동시에 수확할 수 있는 자연적인 특성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 점을 지적하면서 요세푸스는 “게네사렛은 여러 과일들과 곡식을 재배하는데 필요한 조건들을 두루 갖춘 축복받은 지역”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 때문에 게네사렛 지방에는 그 면적에 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으며, 갈릴리 지역의 다른 곳들에 비해 서민들이 살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예수께서 그 곳에 도착하시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를 에워싼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찾은 까닭이 다른 곳에서의 경우와 조금 다르다. 예수님이 그 땅에 발을 디디시자 그들을 알아보거나, 그에 관해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오셨다고 각처에 다니며 알려서 각종 불치의 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온 것이다.


향기로운 꽃나무에 꽃이 피면 원근각처에서 벌과 나비들이 날아들 듯이 사랑과 권능의 예수님이 그곳에 오셨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 지방 구석구석에서 신음하던 병자들이 앞을 다투어 모여든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는 곳마다 그들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의 향기가 풍겨나야 함을 깨닫게 해주는 대목이다.


아름다운 환경에 둘러 쌓였으며, 비옥한 토양에서 풍족한 곡식과 과일들을 거둘 수 있는 게네사렛 땅에도 수많은 병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인간의 행복과 평안은 풍요로운 물질과 평화롭고 안정된 외적 환경에서만 오는 것이 아닌 것임을 말해준다.


안락한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이 구비된 가운데 부족함 없이 살아도 무서운 병마로부터 해방된다는 보장은 없으며, 마음의 걱정과 근심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게네사렛 각처에서 고통 받던 환자들을 보며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게네사렛에서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치기만 하셨지, 그들에게 가르치시거나 설교를 하지는 않으셨다. 견디기 힘든 육신의 고통과 심한 정신적 갈등을 지낸 그들에게 말씀 아닌 행동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일깨워주시며, 그의 사랑을 깨닫도록 해주신 것이다. 가르침과 말씀선포의 중요성은 크기만 하다. 그러나 행함이 없는 말씀만의 증거는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듣는 이들을 실망시킬 뿐이다. 


성수주일을 강조하면서 당장은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주일에 가게 문을 닫으면 결국은 합동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더 큰 축복을 받는다고 열정적으로 설교하던 분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자신은 주일에 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그의 부인은 가게를 열고 일을 했다. 얼마 못가 그가 사역하던 교회도, 운영하던 가게도 문을 닫고 만 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다.


가가호호를 방문하며 전도하는 이들의 열성은 참으로 본받을 만하다. 하지만 그들의 삶 속엔 “예수 믿는 사람의 향내”가 풍겨나지 않는다면 그들의 수고는 헛될 것이며, 주위의 비난의 대상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그를 찾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들려주시는 대신 그들의 병을 치유해 주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며 그의 사랑과 자비를 깨닫게 해주셨다. 그런데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방법이 다른 곳에서와는 좀 달랐다. 병자들이 간구하는 대로 그의 옷자락을 만지도록 허락하셔서 그들의 병을 낫게 해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마치신 후 마지막 설교를 하시면서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할 것은 물론 나보다 큰일도 할 수 있다.”(요 14:12)고 말씀하셨다. 그 후 오순절에 성령세례를 받은 제자들이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자 사람들이 병든 자들을 거리에 메고 나와 침대와 담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에 그의 그림자라도 덮이기를 바랐다.(행 5:12)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이 행한 이 모든 기적들은 예수님의 옷만 만져도 어떤 병이라도 퇴치되는 하나님의 영의 능력을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예수님에 의해 나음을 입는 게네사렛의 숱한 병자들이 보인 반응에 대해 아무 것도 성경에 기록된 것이 없다. 열병에 시달리던 베드로 장모는 병이 낫자 즉시로 그녀를 고쳐주신 예수님의 시중을 들었고(마 8:14-15), 18년 간 허리를 펴지 못하던 여인도 예수님의 안수를 받고 정상인이 되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눅 13:12-13) 


하지만 게네사렛에서는 병이 나은 수많은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거나,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이다.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던 것이 이루어지자 더 이상 예수님에게서 얻을 것이 없다고 여겨 제각기 집으로 돌아갔음을 의미한다.


이 같이 서글픈 일은 오늘날 매일매일 우리들 주위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 성취되는 순간 하나님과의 관계를 청산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의 공통된 기도제목은 “자신과 가족”들을 위한 것이다.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기쁘게 들어주시는 기도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일을 위한 것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기에 처한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그들을 심한 박해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대신 그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주옵소서.”(행 4:29)라고 간구한 것처럼 말이다. 


기도의 초점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아닌 우리가 원하는 것”에 맞추는 것도 문제지만, 우리를 위한 기도가 성취되면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밀어내는 것이 더 큰 문제다. 밀려나가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아프고 슬픈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 없는 우리들의 삶은 어떤 결실도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교인으로서의 의무는 행하지 않으면서 권리만 주장하는 것도 하나님을 배반하는 행위이다. 어떤 면으로든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에 감사와 헌신으로 보답하지 않는 것은 저속하고 부끄러운 죄악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계속적으로 반복하여 범하는 죄가 “필요한 때만 하나님을 찾는 기회주의적인 행위”임을 인식한다면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자명해진다.


우리들을 태운 인생의 뗏목의 널판들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하면 겁에 질려 울부짖지 말고 예수님을 붙잡아야 한다.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님의 몸에 손만 대면 나의 인생은 새로워진다는 믿음을 지니고 예수님께 다가왔던 혈루증 앓던 여인과 같은 자세로 말이다. 


예수께서 사랑과 권능의 손길을 내밀어 침몰하는 우리들이 탄 뗏목을 붙잡아 주시면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항로를 정할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가 살아야 할 인생을 살 수 있는 곳으로 향해야 한다. 


그런 인생의 항해를 하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사도 바울이 들려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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