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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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기적-18년간 불구이던 여인을 고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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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하시고,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하거늘,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가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눅 13:10-21)

 

 

회당은 예수께서 공생애 초기에 자주 찾던 곳이다. 별다른 제재 없이 가셔서 가르치시며, 말씀을 선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색안경을 쓰고 바라보기 시작하면서부터 예수님은 회당 출입을 자제하셨고, 여기 기록된 것을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회당에서의 사역은 복음서에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마지막 방문이 된 안식일에 회당에 모인 사람들 중에 18년 동안 귀신 들려 허리가 꼬부라져 전혀 펴지 못하는 여인이 있었다. 


불구자 치고 인간의 대열에 끼지 못하고 사회에서 격리 당하거나 소외당하며 살아야 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이 여인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으리라. 허리를 펴지 못하여 정상인의 절반 정도 키밖에 되지 못하는 외형을 지닌 것은 여자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는 육신의 고통과 더불어 그 보다 몇 배나 심한 심적 아픔을 지닌 채 18년 이란 세월을 지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여인은 낙망하지 않고 언젠가는 그녀의 인생에도 광명한 새날이 밝아올 것을 믿으며 살아왔다고 생각된다.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회당에 그녀가 앉아 있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녀가 불편한 몸을 이끌고 열심히 회당에 나온 것은 하나님께서 그녀가 악령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살아가게 해주실 것을 확신한 까닭이다. 


그 여인이 그런 믿음의 소유자였음은 예수께서 그녀를 “아브라함의 딸”이라 하신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기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믿음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암5:4-5)고 외쳤다. 형식적이며 가식적인 예배를 드리면서 제물을 바치지 말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순종해야만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며 보람된 삶의 길을 열어주신다는 것을 전한 것이다.


예수께서 “아브라함의 딸”이라 인정한 이 여인은 비록 사탄에게 사로잡혀 슬픔과 괴로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었지만 그녀가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빛과 소망의 세계로 인도해 주시리란 확고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녀는 사람들의 멸시와 냉대의 눈초리를 마다하고 회당에 나와 하나님의 손길이 그녀에게 미칠 순간을 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날 회당에 나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며, 어떤 이들은 보기흉한 몰골을 지닌 장애인이 왜 집에 있지 않고 회당에 나왔느냐고 못마땅하게 여기며 그녀 옆에 앉기를 꺼렸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상에서 가르치시던 예수님은 그녀를 보는 순간 그녀를 부르신다. 그녀가 어떤 인생행로를 걸어왔는지를 알았음은 물론 그녀의 마음에 간직한 간절한 소망까지도 들여다보시고, 그녀를 부르신 것이다. 누구든지 그에게 나오면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을 품어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신 까닭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는 순간처럼 기쁘고, 감격스럽고, 의미 있는 시간은 없다. 예수님의 부름에 응하여 그 앞에 엎드리는 사람마다 변화하여 새로운 인생길을 걷게 되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신 해를 분기점으로 “주전”과 “주후”로 나누어진다. 예수님이 오신 이후 역사의 흐름은 그 방향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예수님 이후에 역사의 흐름이 달라진 까닭은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역사가 형성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애벌레가 탈바꿈하여 화려한 나비가 되듯이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하며, 이처럼 주안에서 피조물 된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역사가 창조되는 것이다.


여자로서 결정적인 신체적 결함을 지녔기에 다른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살 수 없었던 여인을 부르신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였다. 그런 후 그녀에게 안수하시자 그녀를 둘러쌓던 어둠의 장막이 걷히고 햇빛 찬란한 세상이 그녀 앞에 펼쳐진다. 꼬부라져 도무지 펼 수 없었던 허리가 펴지면서 그녀가 완전히 정상적인 여자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눈물과 한숨 속에 평생을 어둠 가운데서 지낼 수밖에 없었던 한 귀중한 생명이 삶의 가치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실현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같은 귀한 역사가 일어난 후 그녀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다. 그녀를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이나 그녀의 곁에서 위로하고 격려해준 배우자나 가족들이나 친지들에게 감사한 것이 아니라 그 놀라운 사랑의 권능을 행사하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그를 찬양한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회당장은 그 여인이 병마로부터 해방되자 분노하여 “일할 수 있는 날이 6일이나 있는데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합당하냐?”며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화풀이를 한다. 예수님은 쳐다보지도 못하고 회중을 향해 예수께서 병자를 치유하신 것이 안식일을 범한 행위라며 억지를 부린 것을 보면 회당장도 말은 그렇게 하지만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 안 했을지도 모른다. 


회당장의 말을 듣고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이 위선자들아, 너희가 안식일에 외양간에 있는 소나 나귀를 풀어 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않느냐? 그렇다면 18년 동안 사탄에게 매어있던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라도 매인 것에서 풀어줘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말이다. 예수께서는 전에도 그가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하시는 것을 문제 삼는 이들에게 “안식일에 너희들의 양이나 소가 구덩이에 빠지면 끌어내지 않겠느냐?”고 물으신 적이 있다. 그때 그들은 아무런 답변도 하지 못했다.


안식일이라도 양이나 소가 구덩이에 빠지면 구해내는 것은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같은 취지의 말씀을 하시며 안식일에 외양간에 매여 있는 소를 풀어내어 물을 먹일 수 있다면 오랜 세월 사탄의 사슬에 묶여 고통 당하던 아브라함의 딸을 사탄의 사슬로부터 풀어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예수님이 말씀에 회당장과 그를 지시하는 사람들은 낯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철두철미 형식과 외형과 격식에 기초를 둔 사회조직과 체제에 억매여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그런 사회체제위에 쌓아올린 그들의 권위와 기득권에 거침없이 도전하는 예수님을 경계하며 미워하기 시작했으며, 그를 제거하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선한 일”을 안식일을 범하는 죄로 단정하여 예수님을 궁지로 몰아넣으려 시도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제도나 규율 보다는 인간을 중요하게 여기시며 사랑하시는 예수님은 안식일이라도 하나님의 자비와 권능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고 돌보셨다. 따라서 18년이란 긴 세월을 불구의 몸으로 극심한 고통과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에 힙 입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회당에 나온 여인을 보는 순간 예수님은 그녀를 불렀고, 그녀에게 안수함으로 그녀의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해주셨다.


우리들 중 그 여자처럼 허리가 꼬부라진 사람은 별로 없을지 몰라도 많은 이들의 마음이 꼬여지고 삐뚤어져 있다. 예수께서 고쳐주신 그 여자보다 더 중하고 심각한 병에 걸려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런 무서운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허다한 사실은 예수님의 슬픔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그녀보다 더 갈급한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아야 할 줄 안다. 그래야만 예수께서 우리를 부르시며 사탄에게 지배 받는 우리의 병든 마음을 고쳐주실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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