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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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기적-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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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에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 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 나셨다.‘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하더라. 예수에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펴지니라.”(눅 7:11-17)

 

 

예수님이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기적은 누가복음에만 나타나있다. 예수께서는 이 기적을 행하시기 하루 전에 가버나움에서 백부장 아들의 병을 고쳐주셨다. 하루도 쉬지 않으시고 죄로 더럽혀진 세상에서 신음하는 인간들의 상한 몸과 마음을 치유하시노라 애쓰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가 얼마나 큰 가를 알 수 있다. 


나인 성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사셨던 나사렛 남동쪽에 위치한 작은 성으로 오래 전에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린 곳이기도 하다(왕하 4:17-37). 예수께서 제자들과 더불어 나인 성 가까이 가셨을 때 성 안에서 장례행렬이 나오고 있었다. 죽은 사람은 어떤 과부의 외아들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하나뿐인 아들을 잃어버리고 슬퍼하는 그 여인과 함께 상여를 따르고 있었다.


이 세상에는 우리를 울게 만드는 슬픈 일들이 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 많은 것들 중 우리를 가장 슬프게 하는 것은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이다. 안톤 슈낙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에서 말해주는 슬픔의 요인 중 죽음으로 인한 것이 4개나 된다. “정원의 한편 구석에서 초추의 양광이 떨어질 때”, “포수의 총부리 앞에 죽어가는 사슴의 눈초리”, 공동묘지를 지나갈 때 “여기 열다섯 살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난 소녀 클라라 잠들다”라 써진 묘비를 읽을 때, “오뉴월 장례행렬”과 마주칠 때 우리는 슬퍼진다는 그의 말에 우리 모두는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리 곁을 떠날 때 우리는 슬픔을 참기 힘들다. 먼 훗날 먼저 간 그들과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알고 있는 믿는 자들도 정든 이들이 생의 경계선을 넘어갈 때 이 세상에선 그네들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슬픔을 억제하기 힘들어 한다. 


나인 성 과부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남편이 먼저 간 후 하나밖에 없는 아들만을 의지하고, 그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하루하루를 살았는데 그 아들마저 그녀를 남겨두고 돌아올 수 없는 머나먼 곳으로 가버렸으니 말이다. 남편의 장례를 치를 때 앞장서서 상주 노릇을 했던 아들이 누워있는 관을 뒤따르는 그녀가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슬픈 눈물만을 흘려야 했음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제자들과 더불어 나인 성으로 들어가시던 예수께서는 이 장례행렬과 마주쳤을 때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가셔서 나지막한 음성으로 “울지 말라” 말씀하신다. 


위로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더 이상 살아야 할 의미와 의욕을 상실한 가련한 여인에게 들려주신 위로의 말씀이시다. 홀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는 슬픔을 당할 때 주위에서 들려주는 위로의 말은 진정 큰 힘과 용기의 근원이 된다. 눈물이 앞을 가리고, 일어설 힘조차 없이 기진맥진 했을 때 “힘내라”는 친구의 다정하고 따뜻한 격려의 말 한마디가 우리에게 삶의 의욕을 되찾게 해주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들려주는 위로나 격려의 말은 형식적이거나 의례적일 때가 많다. 설사 진정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의 원인을 제거해 줄 능력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외아들의 관을 따라 장지로 향하며 흐느끼는 여인에게 예수께서 “울지 말라”하신 것은 그녀의 슬픔과 아픔이 얼마나 큰가를 알고계시는 구세주의 위로임과 동시에 그녀의 눈물을 씻어주시겠다는 약속이기도 했다.


예수님은 나인 성 과부뿐만 아니라 환난과 고통과 슬픔을 당해 진통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참된 위로자로서 다가오실 뿐 아니라 그들의 모든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심으로 그들의 눈물을 씻어주실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울음을 그치라 말씀하신 후 가까이 다가가 관에 손을 얹으신다. 그 당시 매장지로 향하는 관에 손을 대는 행위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관에 손을 대시는 예수님을 저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관을 메고 가던 사람들은 예수께서 관에 손을 대시자 멈춰 선다. 사실 예수님은 관에 손을 얹으심으로 멈추어 서라는 무언의 명령을 내리신 것이다. 예수께서 장례행렬을 멈추신 까닭은 슬픔의 여인 나인 성 과부를 위로하시며,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겠다 하신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장례행렬이 멈추어 서자 상여를 따르던 사람들이 의아심과 호기심이 가득 찬 눈빛으로 예수님을 주시 한다. 


예수님은 그들의 시선을 외면하신 채 관을 향해 “청년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일어나라.”명하신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도 죽은 지 나흘이나 된 그의 시신이 누워있는 무덤 밖에서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큰 소리로 부르신다. 그 보다 먼저 일인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면서도 예수님은 죽은 청년을 향해 “일어나라”고 명령 하신다. 그 명령에 순종하여 관 속에 누었던 젊은이가 일어나 앉는다. 예수님의 말씀의 권능이 어떠한가를 너무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역사를 통해 보면 수많은 영웅들이 절대적인 권력과 권위로 세상을 정복하며 지배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죽음을 굴복시키지는 못했다. 오직 예수님만이 말씀으로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신 것이다. 엘리아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렸고(왕상 17:21-24),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렸지만(왕하 4:32-37) 두 경우 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경우엔 산자와 죽은 자의 주인이신 예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말씀하신 대로 “일어나라”명하시자 죽었던 젊은이가 살아난 것이다.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이 관에서 일어나 말까지 하게 된 것은 떠났던 생명이 완전히 그에게 돌아온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 앞에서는 죽음의 공포와 횡포는 아무 힘도 발휘할 수 없다. 후에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는 사람마다 죽어도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날 것이라며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라 외칠 수 있었던 것은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 앞에서 죽음의 권세는 무력함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으로 죽었던 젊은이를 살려서 어머니에게 돌려주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찬양하며, 위대한 선지자가 나셨다 하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돌보아 주셨다 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온 유대와 그 부근에 널리 펴져나간다. 


나인 성에 오시기 하루 전에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병들어 죽게 된 백부장 하인을 고쳐주신다. 그때 백부장은 예수님께 병든 자기 하인을 살려달라고 간청한다. 직접 그의 집에 오실 것 없이 말씀만 해주시면 그의 하인은 완쾌될 것이라며 간절히 청하는 백부장를 보며 예수님은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눅 7:9) 칭찬하시며 백부장 하인의 병을 고쳐주셨다. 


나인 성 과부는 그 백부장과 같은 믿음도 지니지 못했고, 예수님을 만나본 적도 없기에 예수님께 그녀의 죽은 아들을 살려달라고 간청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던 장례행렬에 다가가 울 수밖에 없는 여인을 위로하시며 그녀 아들의 생명을 되찾아 주심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신 것이다. 인간을 향한 구세주 예수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의 발로이며, 죽음까지도 무릎 꿇리는 예수님의 권능을 보여주신 것이다.


동일한 예수님이 우리들의 처지를 항상 감찰하시며, 우리들이 슬퍼하며 고통당하면 찾아와 위로하시며 우리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시고, 우리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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