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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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기적-오천 명을 먹이시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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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시 앉으시니, 마침 유대인의 명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고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니이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을 앉게 하라.’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그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요 6:1-15)

 

 

 안드레로부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든 소년의 도시락을 받아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명하여 오천의 군중들을 떼를 지어 푸른 잔디에 앉게 하신다. 군중들은 불만이 있으면 소란을 피우거나 난동까지 부리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예수님을 둘러싼 무리도 피곤하고 하루 종일 먹지도 못했기에 쉽게 폭파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제자들이 시키는 대로 50명 혹은 100명 씩 무리를 이루어 잔디위에 질서정연하게 들러 앉는다. 그러자 예수님은 떡과 물고기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기도를 하신 후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갖다 주라 하시고, 물고기도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신다. 


 조용히 앉아 기다리던 사람들은 제자들이 가져다주는 떡과 물고기를 맛있게 그리고 마음껏 먹는다. 배고픈 군중들이 성난 폭도들이 되어 유혈사태를 연출할 수도 있었을 상황을 예수께서는 사랑과 자비의 연회장으로 만드시어 그들을 배부르게 먹이신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읽다 이 부분에 이르면 난 목자를 따라 우리를 떠난 양들이 푸르른 초장에 당도하여 향긋하고 연한 풀을 마음껏 뜯어먹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장면을 머리에 그려보곤 한다. 스펠존 목사는 이 광경을 “예수께서 인간의 무질서를 하나님의 질서로 바꾸셨다.”라 묘사하고 있다.


 이 잔치에 참석한 사람의 수는 만 명이 더 되었을 것이다. 남자만 오천이 넘었으니 여자와 아이들을 합하면 적어도 배가 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사람의 수가 얼마가 되든지 또 그들의 성분이 어떠한가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예수님의 권능과 자비는 한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장정만 오천이 넘는 큰 무리를 배불리 먹인 사랑의 향연이 끝나자 예수님은 남은 조각들을 거두어 드리게 하신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자들이 떡 조각과 물고기 부스러기들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원동력이 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키고 남은 떡과 물고기가 처음보다 몇 백배나 많아진 것이다.


 하늘창고의 문이 열리면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무제한으로 쏟아져 내릴 수 있는 법이다. 예수께서 남은 조각들을 거둬드리게 하신 것은 풍요한 사람들이 먹고 버리는 음식만 잘 처리해도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는 숱한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는 귀한 교훈을 가르쳐 주신 것이기도 하다. 오늘 날 양식의 절대량은 부족하지 않지만 분배가 제대로 되지 못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어처구니없는 현상이 전개되는 현실 속에서 우리들이 받아드려야 할 소중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남은 것들을 모아드린 표면적인 까닭이라면 요한복음의 모든 기록들이 그렇듯이 그 내면에 더욱 중요하고 깊은 진리가 숨어 있다. 


 사람들이 먹다 흘린 떡 조각이나 물고기 부스러기들이 산과 들에 방치되면 자연환경을 오염시키는 쓰레기로 남아있을 뿐이다. 마찬가지고 각처에 흩어져있는 작고 힘없는 교회나 가난하고 미약한 성도들은 그들의 힘만으로는 세상에 어떤 영향력도 미치기 힘들다. 그러나 그들이 모여서 힘을 합하면 세상의 어둠을 밝히고, 죄악을 정화시키는 놀라운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진리가 남은 조각들을 거두어 열두 광주리를 가득 채운 사실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기도하고 떼어주는 떡을 나누어 주고, 그 남은 것들을 거두어 드린 이들은 제자들이다. 예수님이 마련하신 사랑의 향연에서 제자들이 손님들을 접대하는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예수님이 선택한 제자들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엡 1:1)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도의 신성하고도 막중한 의무와 권위를 지닌 하나님의 일꾼들인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께서 베푸신 사랑과 자비의 연회장에서 손님상을 차리고 치우는 하인의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의 권위는 섬김을 받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데 있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밝혀준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의 놀라움은 컸다. 그들은 그 같은 놀라운 권능을 보이시는 예수님을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선지자”라 단정한다. 애굽을 빠져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방황할 때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내려주셔서 그들이 먹이셨다. 


 이때 지도자 모세는 백성들에게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 지니라.”(신 18:15)라 들려주신다. 이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모세가 광야에서 하나님께 간구하여 백성들이 만나를 먹게 되었듯이 빈들에서 그들에게 떡과 물고기로 배를 채우게 해주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약속된 “제2의 모세”라 믿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온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광야에 내린 만나가 모세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면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께서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신 “창조행위”인 것이다. 


 그런데도 군중들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아닌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여기고 그를 임금으로 삼아 그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로마정권에 도전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의 목적은 이스라엘을 로마의 속박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광야에서 40일 금식기도를 마치신 그에게 사탄이 닥아 와서 “나에게 절하면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네게 주겠다.”(마 4:8-9)라 한 사탄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신 것이다. 그 후에 가이사라 빌립보 지방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라 고백한 베드로가 예수께서 십자가로 가시는 길을 막으려하자 “사탄아 물러가라.”고 호통 치신다. 그가 인류의 구세주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 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직접 본 군중들이 흥분하여 그를 왕으로 삼으려 하자 그들을 내버려 두고 홀로 산으로 들어가신 것이다. 


 예수께서 혼자 산으로 향하신 것은 그를 앞장 세워 로마정부와 싸우려는 군중들을 피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주권”을 되찾아 줄 정치적인 지도자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그들로 하여금 그리로 향하게 하려는 구세주이심을 군중들과 제자들이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함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예수께서는 결코 실패해서는 안 될 인류구원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아버지 하나님과 교통하는 기도의 시간이 필요했다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2,000여 년 전 갈릴리 해변의 산 위에서 예수님은 빌립에게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일 수 있겠느냐?”물으셨다. 그때 빌립은 “우리에겐 떡을 살 돈도 없고, 이 근방엔 그 많은 떡을 살 곳도 없습니다.”라 대답했다. 지금 예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죄로 어두워진 세상을 밝히고, 높아만 사는 죄악의 물결을 잔잔하게 할 좋은 방도가 없겠느냐?‘고 물으신다면 무어라 대답할 것인가. 빌립과 같이 ”죄악으로 만연된 세상에 대항하여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라고 물러설 명분을 만들어 놓고 뒤로 빠질 것인가? 아니면 안드레를 본받아 “주님, 별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지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같은 이 보잘 것 없는 몸을 드리오니 사용하여 주십시오.”라며 “나의 나 된 것을 예수님께 바치겠는가?” 


 선택은 언제나 우리들의 몫이다. 그러나 어떤 것을 택하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아무리 연약하고 작은 것이라도 예수님의 손에 맡겨지면 한없이 강해지고 커진다는 사실”이다. 전능하신 예수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 하신 약속을 믿고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를 내어드리면 예수께서는 우리를 사용하셔서 어느 때라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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