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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억의 칼럼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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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설교-인생의 황금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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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남에게 대접받기 원하는 만큼 남을 대접하라.”는 평범한 인생의 교훈 아닌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도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인생의 황금률”이다. 이 말씀은 사회적 윤리의 정점이며, 모든 윤리적 교훈의 최고봉이기도 하다. 


 유대의 랍비들 중에서도 산상수훈에 수록된 예수님의 말씀과 유사한 것들을 가르친 이들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들 중 아무도 예수께서 주신 황금률과 같은 말을 하지는 못했다. 예수님의 말씀은 혁명적이고도 새로운 가르침이며, 인간 모두가 목표로 삼고 실천해야 할 삶의 지침이 한 문장에 요약된 것이다.


 혹자는 말한다. 예수님의 황금률과 비슷한 말을 한 학자나 성현들이 여럿 있다고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내용적으로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은 의미의 말을 한 사람들이 있으니까 말이다. 


 한 이방인이 유명한 유대의 랍비 힐렐에게 “내가 한 발로 서 있을 수 있는 짧은 시간에 율법 전체를 설명해 줄 수 있다면 유대교로 개종하겠소.”라 하자 힐렐이 대답했다. “당신이 당신 자신에게 하기 싫은 일은 다른 사람에게도 하지 마시오. 그것이 율법의 전부이고, 나머지는 다 부수적인 설명에 지나지 않다오,”라고. 


 얼핏 들으면 예수님의 황금률과 같은 말로 생각된다. 그러나 힐렐의 말은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것이다. 공자도 제자들에게 “너 자신에게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고 부정형의 황금률을 가르친 바 있다. 


 불교에서도 “믿음의 찬가”속에 “모든 사람들은 학대받기를 원하지 않으며, 죽음 앞에 두려워 떤다. 너희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니 살생하지 말며, 살생과 관련된 어떤 일도 하지 말라.”란 대목이 나온다. 내용 면에서는 모두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비슷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하지 말라.”는 부정형이다. 오직 예수님 말씀만이 “하라.”는 긍정형이다. 


 내용만 같으면 그만이지 부정형이든 긍정형이든 무슨 상관이 있냐는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 둘의 차이는 엄청나게 크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안하는 것은 그다지 힘들지 않다. 그리고 남에게 해가 되거나 상처 주는 일을 삼가는 것은 종교적인 원칙 이라기보다는 사회생활을 하며 준수해야 할 기본적인 도덕 내지는 윤리의 문제다.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도 유익한 사람으로 인정받기는커녕 무익한 인간으로 낙인찍힐 수도 있다. 


 믿는 자로 행세하면서도 교회를 섬기는 일과는 담을 쌓고, 선교활동도 외면하고, 구제사역에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 이들은 실제로 교회에 해를 끼치는 일을 안 하면서도 진실한 기독교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처럼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은 실천할 수 있음은 물론 그것을 행한다 해도 이웃에게 유익을 끼치고 사회의 단합과 화평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하는 것”은 그것을 실천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도록 힘들다. 


 만약 예수께서 “원수를 미워하지 말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저주하지 말라.” 하셨다면 많은 이들이 그런 일은 할 수 없다며 돌아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원수를 피해 멀리 가서 만나지 않고 상대하지 않으며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명령은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실천 불가능한 과제“로 부각되는 것이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예수님의 황금률과 “원수를 사랑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은 본질적으로 같다고 볼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을 자기처럼 대우하려면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막 12:31)는 예수님의 분부를 실천할 수 있어야 그의 황금률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교통법규는 날로 증가하는 차량들을 통제하여 교통질서를 유지하며, 끔직한 교통사고들을 예방해준다. 각종 제도와 법규나 법률은 우리가 속한 단체나 사회나 국가가 혼돈과 무질서의 와중에 빠지지 않게 해준다. 


 하지만 세상의 어떤 규정이나 법도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살게 해 줄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대접받기 원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만으로는 될 수 없으며, 외부의 강요나 법으로는 더욱 안 된다. 그것이 가능해지려면 우리의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깃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5:12)는 예수님의 계명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우리를 상대의 입장에 놓고, “내가 저 사람의 처지라면 무엇을 원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19세기 영국의 주교 라일은 “복음서 주석”에서 “사람들이 피차 상대의 입장에 서서 생각한 후 행동한다면 세상을 어지럽게 만드는 수많은 문제들이 사라질 것이다.”라 말하고 있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에 요약되어 있으며, 남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며, 사랑은 율법의 완성”(롬 13:8-10)이기에 예수님은 그의 황금률을 지키는 것이 “율법과 선지자”라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대접받기 원하는 대로 다른 사람들을 대접할 수 있는 원칙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내가 너보다 위에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리고 고정관념처럼 되어버린 그런 생각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인정받기 원하는 바람 때문에 형성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나를 대접하듯이 남을 대접하려면 상대를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그래야만 나도 그에게서 인정받을 수 있고, 나와 그 사이에 바람직한 인간관계가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남을 인정한다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임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의 눈 속에 자리 잡은 들보는 문제될 것 없지만 남의 눈에 있는 티는 모든 문제의 근원이 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들을 용납할 수 있다면 서로 화합하고 단결하여 아름답고 평화스러운 삶의 공동체를 이 땅 위에 이룩할 수 있는 것이다. 


 “언제나 겸손하고 부드러우며 인내와 사랑으로 서로 대하라.”(엡 4:2)는 말씀은 우리들이 피차 원하는 대로 대접하고, 대접받을 수 있으려면 서로 사랑하고 용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용납받는 것보다 더 큰 인간의 바람은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여 그들의 섬김을 받는 것이다. 그러기에 황금률을 준수하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것은 남을 섬기는 것이다. 


 우리에게 “너 자신에게 하듯 남을 대접하라.”하신 예수께서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 왔노라.”(막 10:45) 하신 것은 우리가 남을 진심으로 대접하려면 그들을 기쁨으로 섬겨야 함을 일깨워 주신 것이다.


 믿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로 입적된 형제자매들이다. 따라서 우리들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그의 아들딸들이기에 사랑으로 하나 되어 아버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섬기며, 그가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독교의 황금률”이며 인생의 모든 지침들이 한 문장에 녹아있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를 가슴 깊이 간직하고, 그것을 준수하며 살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 안에서 인생을 새로운 세계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 수 있는 길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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