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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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설교-복음을 배척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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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

 

 산상수훈이 들려주는 모든 말씀은 듣는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보다는 갈등과 의구심을 느끼게 될 때가 많다. 그 중에서도 마태복음 7장 6절의 말씀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줄만큼 과격하고 거칠기까지 하다. 우선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께서 인간을 “개”나 “돼지”에 비유한 자체가 놀랍다. 


 하지만 예수님이 폭군 헤롯을 “여우”라 했으며(눅 13:2), 위선적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회칠한 무덤”, “독사의 새끼들”(마 23:27, 33)이라 부른 것을 상기하면 예수께서 어떤 사람들을 “개나 돼지”로 생각하시느냐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야 할 줄 안다.


 거룩하고 귀중한 것을 개나 돼지에게 주지 말라는 말씀이 의아하게 생각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기독교는 배타적인 종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거룩하고 귀중한 것”을 성찬예식에 사용하는 “빵과 포도주”라 해석함으로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는 사람들도 있다. 


 예수님 당시에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인 그들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초대교회는 기독교를 핍박하는 외부세력과 교회 내에 존속하는 이단자들과 그들에게 동조하는 사람들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며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이방인이나 이단에 물든 사람들을 성찬예식에 참여시키지 않았다. 이 사실을 근거로 “거룩하고 귀한 것”은 성찬용 빵과 포도주이며, 개나 돼지는 이방인이나 이단에 물든 사람들 또는 세례 받지 않는 사람들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에 동조하는 성경학자들은 별로 많지 않다. “개나 돼지”가 불신자나 이단자들을 가리킬 수는 있어도, 반드시 그들만을 의미한다고 단정하는 것도 잘못된 생각이다.


 역사적으로 불 때 개는 인간과 친밀하고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오늘 날에는 반려동물로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보호를 받고 있다. 그러나 2000여 년 전 팔레스타인 지방의 개들은 난폭했으며, 거리의 쓰레기를 찾아 헤매는 더럽고 위험한 동물이었다. 돼지는 진흙 구덩이에 살았기에 예로부터 사람들이 더럽게 여겼으며, 특히 유대인들은 돼지를 불결하고 부정한 짐승으로 여겨 가까이 가는 것조차 꺼렸다. 


 성경에도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고 돼지가 몸을 씻고도 다시 더러운 구덩이에 뒹군다.”(벧후 2:22)고 기록되어 있어 개나 돼지는 곁에 두어선 안 죌 동물들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영적으로 눈멀고, 죄의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불신자나 이방인들은 개나 돼지에 비교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가나안 여인이 귀신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청원했을 때 예수께서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하 신후 (마 15:14)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마 15:26)고 말씀하신 것으로부터도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개“로 취급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이 불신자들과 이방인들을 개로 여기며 경멸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예수님은 이방인이나 불신자들을 개나 돼지로 여기지도 않으셨고, 그들을 멸시하거나 배척하지도 않으셨기 때문이다.


 이제 예수께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하신 말씀을 하나로 묶어 그 의미를 생각해 볼 때다. 이미 언급한대로 “거룩한 것과 진주”는 성찬식에서 쓰는 “빵과 포도주”를 뜻하지는 않는다. 그러기에 이방인이나 불신자들 또는 세례받지 않은 사람들을 성찬예식에서 배제시키라는 취지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것과 진주”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거룩한 것과 진주”는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믿는다. “하늘나라는 귀한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다.”(마 13:45)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그것을 말해준다.


 사람에 따라서는 또 다른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요지는 불신자나 이단자들에게는 구원의 소식을 전파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절대로 그러하지 않다.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주신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은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믿는 자들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선포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복음의 기쁜 소식을 들으면서도 복음을 받아드리기는커녕 완강하게 배척하며, 조롱하고, 멸시하는 사람들은 활짝 열린 구원의 문으로 들어갈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이다.


 칼빈은 복음의 혜택으로부터 자신을 제외시키는 이들은 “극도로 타락했거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경외하지도 않는 부류의 사람들이 아니라, 돌이킬 수 없이 완악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척하고, 멸시하며, 경멸하는 병에 걸려 치료 불가능한 환자들”이라 정의한 바 있다. 초대교회의 교부 중의 하나인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권리를 박탈당한 “개와 돼지”는 “하나님을 모욕하며 그에게 도전하는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들”이라 말했다.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끝까지 거부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가 자기네 영혼을 파멸시키는 장본인들이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거룩한 것과 진주를 짓밟고 돌아서 그것을 준 사람을 물어뜯는 개나 돼지처럼 말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전도의 사명을 주어 떠나보내면서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마 10:14)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도 바나바와 1차 선교여행을 할 때 버시비아 안디옥에서 유대인들이 그들의 전하는 복음을 반박하며 비난하자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행 13:45) 말했으며, 유대인들이 계속하여 그와 바나바를 박해하자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갔었다.(행 13:51) 


 2차 선교여행 시에도 고린도에서 그들이 증거하는 복음을 배척하며 욕설을 퍼붓는 이들을 향해 바울은 ”옷의 먼지를 털면서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행 18:6)헸으며, 그의 마지막 선교지인 로마에서도 복음을 배척하는 유대 지도자들에게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도무지 알지 못하니.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행 28:26-28)고 선언했다. 


 이 같은 사실들은 믿는 자들은 땅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해야 마땅하지만 복음증거의 대상을 제한해야 할 때도 있을 수 있음을 말해준다. 
 계속적으로 복음을 듣고, 그 능력을 보면서도 복음을 받아드리는 대신 반항하고, 경멸하며 복음증거자들을 핍박하는 이들은 그들 앞에 열린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 문을 닫아버리는 무지하고 불쌍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기억해야한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어쩔 수 없는 경우나 상황에서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믿는 자들은 어떤 환난이나 모욕과 멸시와 천대를 당하며 참기 힘든 핍박을 받더라도 세상 끝까지 달리면서 “내 부활의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받았으니까 말이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은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 않으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그대로 갚지 아니하시며”(시 103:10) 한없는 인내와 자비로 우리들을 그의 품에 맞아들인 것처럼 불굴의 인내심을 지니고 어둠 속에서 헤매 이는 이들에게 “빛의 사자”가 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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