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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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설교-염려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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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옷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 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25-31)

 

 

 “의식주”처럼 인간 삶에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런데 우리들 주위에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이 세 가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고통당하고 있다. 그러기에 많은 목회자들이 오늘의 본문말씀을 주제로 설교하는 것을 듣게 되는데, 그것과 관련하여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염려하지 말라.”는 예수께서 “보물을 하늘에 쌓으며, 보아야 할 것만을 보는 시야를 지니고, 하나님만을 섬기라”(마 6:19-24)는 가르침대로 살기로 결단한 이들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올바른 물질관과 시야를 지니고, 하나님께 충성하면 근심과 걱정과 염려로부터 해방될 수 있음을 가르치신 것이다. 


 아무런 목표나 목적 없이 물위를 떠도는 부유생물처럼 사는 사람은 없다. 인간은 그 무언가를 추구하며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마다 그 추구하는 것은 다르다. 선하고, 올바른 목표를 정하고 달려가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이기주의적 야망을 성취하기 위해 전력투구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둘 중 어느 것을 택해야 할지는 자명하다. 예수님을 따르기 원한다면 마땅히 전자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이익과 영광만을 추구하며, 그런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며, 염려하는 것이 “먹고, 마시고, 입는”문제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무엇을 먹고, 마시며,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마 6:25,31,34)고 세 번이나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일상생활에 관심이 없으시거나, 우리가 육신의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것들을 가볍게 여기셔서가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푸른 풀밭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며 우리들의 매일 매일의 삶에 부족함이 없도록 보살피실 뿐 아니라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째서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고, 마시며,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을까? 간단히 요악하면 믿는 자가 해야 할 염려는 주어진 사명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어야지 무엇을 먹고, 입을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인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그 옛날 아합 왕의 박해를 피해 그릿 시냇가에 숨은 엘리야에게 까마귀를 시켜 떡과 고기를 날라다 주었던 것처럼(왕상 17:2-5) 우리 모두에게 양식과 의복을 공급해 주지는 않으신다. 


 믿는 자들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식량이나 물품들을 얻기 위해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 동시에 전반적인 경제침체로 인해서나 뜻밖의 재난에 대비한 준비도 해야 한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해도 염려하며 자신을 확대해서는 안 된다. ‘염려’는 ‘믿음의 결핍’에서 오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근심하지 말라 말씀하시는 데도 계속하여 염려하며 근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돌보아 주신다는 약속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런 이들을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 부르며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라 물으시는 것이다. 염려는 키를 자라게 하기는커녕 줄어들게 하며, 우리 생명을 단축시킬 뿐이다. 


 믿는 자들이 먹고 사는 문제로 인한 걱정에 억매이지 않아도 좋은 까닭을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시는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보며 깨달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둥지 안에 편히 쉬고 있는 새들을 찾아다니시며 먹이를 주지는 않는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찾는다.”란 말처럼 새들은 새벽부터 쉴 사이 없이 먹이를 찾아다니기 때문이다. 


 조류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먹이를 구하기 위한 참새들의 노력은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 없이 크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먹을 것을 찾게 해주시는 까닭이다. 마르틴 루터가 작고 힘없는 참새들을 “위대한 신학자이며 설교자”라 부른 까닭을 음미해 보아야 할 줄 안다. 


 예수님 당시에 팔레스타인 지방엔 백합화가 유난히 많았다고 한다. 산과 들에 가득히 피어나는 백합화는 솔로몬이 입었던 화려한 옷들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런 백합화를 바라보며 사람들은 감탄을 금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비롭고 아름다운 백합화도 그 짧은 생명이 끝나면 진흙으로 지어진 아궁이에 땔감으로 던져지곤 했다. 그렇게 소멸되는 백합화를 왕실의 의상보다 화려하게 피우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헐벗게 내버려 두겠느냐고 예수님은 반문하고 계신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먹을 것과 입을 것들로 인한 근심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낼지 몰라도 믿는 자들이 의식주 문제로 진통한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을 향한 불신이 염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반석과 방패와 망대와 피난처”(삼하 22:2)이시다. 따라서 우리들은 염려라는 굴레를 벗어 던지고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사명”을 위해 매진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믿는 자라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고와 노력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살후 3:10)고 성경이 말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수많은 새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날라다 주는 먹이를 먹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하나님께서 자연 속에 마련해 둔 먹이들을 찾아다닌다. 각종 꽃들이 향기를 발하며 피어나고, 수없이 많은 나무들이 철따라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햇빛을 받아들이고,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려 양분을 빨아들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눕는”수고를 할 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주시는 것이다.


 믿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수고의 땀을 흘릴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먹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기만 하다. 그처럼 슬픈 일이 일어나는 근본적인 원인은 식량의 분포가 제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북미 땅에선 너무 많이 먹기 때문에 병들어 죽어가고, 아프리카를 비롯한 여러 미개발 국가에선 먹지 못해 굶어 죽은 사람들이 늘어가는 기이한 현상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미국 인구의 3%가 미국 전체 부의 80% 이상을 소유하고 있다는 어느 통계로부터도 “공정한 배포”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하고도 중요한 문제인가를 알 수 있다. 믿는 자들은 헐벗은 이들에게 옷을 입히고, 굶주리는 이들을 먹이는데 앞장 설 책임이 있는 것이다.


 또 하나 기억할 것은 믿는 자들도 궁핍이나 환난에서 자유로울 수만은 없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열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믿는 사람들도 “열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속에 처해질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세상이 주는 근심과 걱정, 고통과 고난, 역경과 시련으로부터 면제되는 특권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진정한 특권은 어려움과 위기가 닥쳐올 때 불신자들처럼 낙망하고 좌절하지 않고 “어두운 밤이 끝나면 광명한 새벽이 찾아오고”, “이 흉흉한 바다를 다 지나면 저 소망의 나라에 이른다.”는 믿음을 지니고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축복된 특권을 사용하면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암 5:4)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근심과 걱정과 절망과 좌절의 파도가 거칠게 이는 어둔 바다를 향해하는 우리가 탄 작은 배의 사공이 되어주실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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