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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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설교-주님 가르치신 기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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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는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며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여 주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리라.”(마 6:8_25)

 


 “하라”는 것 두 가지와 “하지 말라”는 것 여덟 가지로 구성된 십계명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1계명에서 4계명까지는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의무에 관한 것이고, 5계명부터는 인간 상호간에 행하여야 할 책임에 대한 것이다. 


 존 칼빈은 주기도문도 십계명과 마찬가지로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져 있으며, 첫 부분에선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면 어떤 간구를 해야 하며. 뒷부분에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면서 구해야 할 것들이 명시되어 있다고 분석했다. 그가 말하는 요점은 십계명이나 주기도문 둘 다 인간의 삶 속에 하나님 이상의 우선순위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칼빈의 그런 해석은 주기도문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뜻이 하늘과 땅에서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시작되는 사실에 그 기초를 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간구에 이어 인간의 필요를 위한 첫 간구는 “일용할 양식”으로 시작되는데,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성경학자들이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가 끝나면서 바로 “육의 양식”을 구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에게서 복음의 횃불을 전달받았다는 성 어거스틴은 주기도문에 명시된 “일용할 양식”은 하나님이 주시는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영적인 양식이거나 성찬식에 사용하는 빵으로 해석했다.  


 칼빈은 그런 어거스틴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았다. 반면 마틴 루터는 “일용할 양식”은 인간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들, 예를 들면 건강한 육신, 안전한 거처, 행복한 가정을 의미한다는 중도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그들의 견해를 종합하여 정리하면 “일용할 양식”은 음식을 포함하여 우리의 일상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따라서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버지 하나님에게 매일 매일의 삶을 살펴보시며 지켜주실 것을 간구하는 것이다. 높은 하늘에 계시되 항상 그의 자녀들과 동행하시며 눈동자처럼 지켜주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삶 속에 있어야 할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신 것이다.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을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각종 병으로 고통당하는 이들을 고쳐주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 그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다.(마 14:13-25; 막 6:30-44; 눅 9:10-17; 요 6:1-15) 이같은 사실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인간의 영혼을 구원할 뿐 아니라 인간에 삶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기 위함임을 말해준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그의 자녀들이 “일용할 양식”이 없어 고통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늘의 만나를 내려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육의 양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은 죄를 용서받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라 가르치신 것이다. 


 혹자는 말할지 모른다. 나는 법과 질서를 존중하는 선량하고 정직한 사람인데 용서받아야 할 죄가 무엇이냐고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행위와 말과 생각까지도 죄일진대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죄 사함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일용할 양식”이 없으면 우리 육신은 메말라 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죄 짐을 지고는 아버지 하나님의 품에 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해 주었으니 아버지도 우리 죄를 용서해주십시오.”라 기도해야 한다고 예수님은 가르치신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예수님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나님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라.” 말씀해 주신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해주는 것이 우리 죄를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범한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며 그 앞에 엎드리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자신이 지은 부끄럽고 추한 죄악들을 용서받으려면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들의 과오나 허물부터 용서해주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이 순서임을 예수님은 일깨워 주고 계신 것이다. 


 고요한 밤에 눈을 감고 생각해보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저지른 숱한 죄악들은 남들이 우리에게 행한 부당하고 잘못된 것들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이 많고도 추악한 것들임을 깨달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저지른 별것 아닌 실수나 잘못들을 최대로 확대하여 가슴에 새기며 “저 사람만을 용서할 수 없다.”고 다짐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럴 때마다 예수님이 들려주신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마 18:21-35)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주인에게서 평생을 벌어도 갚지 못할 엄청난 빚을 탕감받고도 자기에게 적은 빚을 진 사람을 가장 가혹하게 대한 용서할 줄 모르는 잔인한 사람의 이야기를 말이다.


 우리가 드려야 할 마지막 기도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이다. 지은 죄를 용서받은 이들은 다시는 죄의 사슬에 묶이지 않고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 그러기에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서 헤어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여기에 두 가지 문제가  대두된다. 첫째는 성경에 하나님은 우리가 악에 물들도록 시험하지 않으신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을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가 그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신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한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주기도문에 언급된 “시험”은 우리를 죄에 빠뜨리려는 “유혹”(Tempting)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확인”(Testing)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성경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타당한 해석은 “시험에 들지 말고, 악에서 건져달라.”를 하나로 묶어 “우리를 악의 길로 인도하려는 악한 자들(마 13:19)로부터 구해달라”는 뜻이라고 믿어진다. 


 두 번째 문제는 성경은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혐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12)고 말해준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각종 “시험”과 “시련”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인데, 그것들로부터 해방시켜 달라는 것은 믿는 자의 기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의문은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를 범죄 하게 하려는 갖가지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악인들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십시오.“라고 기도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해결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고 악에서 구해 달라.“는 간구는 우리는 악하고 강한 사탄과 맛서 싸우기엔 너무도 연약하니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파멸시키려는 사탄의 세력을 물리쳐 달라는 기도인 것이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바리새인들이나 이방인들의 기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그의 자녀들이 드려야 할 기도의 표본이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지고, 하나님의 뜻과 나라가 하늘과 땅에 이루어짐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해달라는 간구로 시작되어, 우리의 삶을 인도하고 보호하시며, 주관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해달라는 것으로 종결된다.


 믿는 자들의 기도의 초점은 하나님의 영광에 맞춰져야 한다. 그런데 무대 위의 배우들처럼 관객들의 박수를 받으려고 그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미사여구들을 총동원하는 바리새인들의 기도나 장황하면서 의미없는 말들을 되풀이 하는 이방인들의 기도 속에는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은 자리잡을 틈조차 없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드려야 할 참된 기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가르쳐주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뜻을 깊이 되새기며 마음과 뜻을 다해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드려야 할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드리는 이 기도가 우리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행동하며 사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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