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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캐나다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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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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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인규 누구인가? 그는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익희 선생과 대결했다 고배를 마시고 1955년 이기붕의 알선으로 국제연합 한국부흥위원회 뉴욕주재 한국대표로 임명되었고, 같은해 제네바회담에서 업서버 자격으로 참석하였으며 그 다음해 외자청장이 되었다.


 여세를 몰아 4년 후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하균씨를 누르고 당선된, 즉 아버지 신익희에 패했던 것을 아들한테 설욕하며 기사회생한 인물이다. 국회의원에 당선되자 이승만 독재하에 내무부장관으로 발탁되면서 갖은 악행을 저지르고 1960년 3•15 부정선거를 총지휘하다 4•19 혁명을 불러온 장본이기도 하다.
 4•19로 자유당정권이 무너지자 3.15부정선거를 총지휘한 원흉으로 지목받아 구속됐다 5.16군사정권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곽영주, 임화수, 이정재 등과 같이 서울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광주 미사리(현 하남시) 출신으로 나와는 불과 2킬로미터 떨어져 살았는데, 늘 지근거리에서 보아 그의 행적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가 자유당 말기에 해온 악랄한 정치폭거는 부지기수지만 한가지만 소개한다. 


 미사리 최씨들이 하늘에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세도가 당당할 때 일이다. 천호동 술집에서 술을 퍼마시고 고성방가 하고, 도로에 방뇨해 경찰이 제지를 하면 “나 미사리 최씨 몰라? 까불면 골로 갈 수 있어” 한마디에 경찰은 차로 집에 모셔다 자장가까지 불러 재우고야 근무처로 오는 기막힌 해프닝을 연출했다.


 4.19가 일어나자 최씨들에게 당한 사람들의 분노는 하늘을 치솟았다. 최인규 집에 불을 지르고 창고를 부수자 그곳에서 참외, 수박이 바리바리 나왔다. 냉장고도 없던 시절에 그 많은 과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볼 때 그의 만행이 어느 정도라는 것을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최씨들에 당한 각성바지들은 대들보를 받줄로 끌고 다니는 복수극을 연출했고, 나도 그 무리에 끼어 기쁨을 만끽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내가 이렇게까지 최인규 가에 적의를 가졌던 것은 1954년 국회의원 선거에서부터였다. 나는 당시 국민학교 6학년이었고, 근동은 온통 덕수이씨 이승만 일가와 최인규 씨족들로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그 무리에 유독 동래 정씨인 난, 어린 나이에도 그들의 독식에 불만이 많았다. 당시만 해도 유교의 뿌리가 깊고, 씨족사회의 우월감 병폐가 있었다. 결정적으로 그들의 눈에 난 것은 그때부터다. 신익희 선생의 선거를 흉내낸 것이 그들로 하여금 미움을 샀던 것이다.


 ”기호는 둘, 기호는 둘 신익희 선생님을 국회로 보냅시다.“ 이 가두선전은 신익희 선생 작은마님(김순이)이 쓰리코터(반트럭)를 타고 직접 선전하고 다녔다. 그 소리를 어린 나이에 아무 뜻도 없이 흉내냈는데, 최씨 할아버지한테 끌려가 호되게 야단을 맞은 것이 앙금이 되었다. 


 이어 장면 내각(제2공화국, 1960년 6월 15일~1961년 5월 16일까지 11개월간 존속)이 들어서자 장면 박사의 특명으로 남한산성 수호장대 옆에 이승만을 위해 세워진 송수탑(기념탑) 철거였다. 그때 안호일씨 지도에 하에 나를 비롯해 다섯명이 송수탑 역시 최인규 집 대들보 끌고 다니듯 부셔버렸다. 이 탑은 1956년 6월 이 대통령의 건강을 기원해 건립된 것인데, 1960년 4•19 이후 장면 정부 명령으로 철거됐다. 현재 탑이 묻힌 곳은 남한산성 정상 근처 평지에 있다.  이 탑이 남한산성에 세워진 이유는 이 대통령이 남한산성을 자주 찾았던 데 기인한다.


 이 대통령은 일 년에 서너차례 남한산성 남문에서 정상까지 걸어 올라간 후 동문을 통해 장경사쪽으로 내려오곤 했다. 이를 보곤 아첨이 많은 광주문화원장을 지낸 박씨가 이 박사의 장수를 누리라는 뜻에서 이 탑을 세웠던 것이다. 


 그 후 5.16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4.19 당시 주동자를 색출하는데 내가 표적이 된 것이다. 당시 군사정권은 정권유지를 위해 빨갱이 사상을 최우선으로 잡았다. 한 예로 “난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강원도 삼척 이승복군의 한마디를 삼천리 방방곡곡에 상징적으로 선전했고, 각 지방마다 소위 반골들이 그 선상에 올랐는데 운이 없게도 내가 그 표적이 됐다. 후에 전두환 정권에서 생긴 삼청교육대 역시 초록은 동색이다. 


 그로 인해 이문동 중앙정보부 분실에서 일주일간 강요에 의한 취조를 받았다. 콧구멍에 물을 붓는 건 기본이고, 손톱 뒤집어 까기, 코에 고춧가루 붓기, 전기고문 등 그야말로 일제치하를 연상케 했고, 퇴학과 함께 제적을 당해 전화국에 입사하였으나, 암흑의 뒷그림자는 여기서도 끊이지 않아, 개인회사로 사우디로 전전하다 이곳 캐나다로 피신하여 제2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안호일씨는 “이승만 박사가 비록 독재를 했다는 흠이 있지만,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대통령이라는 역사적 차원에서 유물 복원이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그는 “역적 비석도 세월이 지나면 다시 세우는데 결과가 어떻든 나라를 세운 초대 대통령 비석이 땅속에 묻혀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못하다”며 빠른 시일 내 탑 복원이 이뤄지길 소원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고, 그런 생각에 한국에 자주 나가 광주문화원을 찾은 이유다. 60여 성상이 흐른 지금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런 악착을 떨었는지, 남는 거라곤 회한뿐인데, 마눌씨 한마디가 울컥 가슴에 와 닫는다. “당신 참 아프게 살았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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