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 오늘 방문자 수: 55 전체: 85,745 )
3.1절 100 주년 안보 특집-조선은 왜 실패하였는가(3)
chonhs

 

 

 (지난 호에 이어)
이런 제도하에서, 경제성장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소위 개혁을 한다면 기존세력의 이권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런 제도를 바꾸려면 이에 저항할 수 있는 대항세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 세력이 길러지질 않았다.


포르투갈이 문자를 소개한 후 기존 엘리트층은 글을 읽게 되었지만 왕은 백성에게 글을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1960년 콩고가 독립했을 때도 이런 빈곤의 형태는 되풀이 되었다. 오랜 세월 이런 착취적 제도가 남아있는 것은 정치권력이 소수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옆 나라 보츠와나


1895년(조선의 한반도 주변에서는 청일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9월, 정기 원양 여객선 케슬호가 영국 프리모스항에 정박했다. 보츠와나에서 온 추장 일행 세 명이 배에서 내려 런던으로 향했다.


이들은 긴박한 사명을 띠고 영국을 찾았다. 백인 우월주의, 인종주의자인 세실로즈 총독으로부터 자신들의 부족을 구해야 했다. 세실로즈는 케이프타운 식민지의 총리를 역임한 영국의 정치인이자 기업가였다. 아프리카 침탈과 식민지화에 책임이 있는 대표적인 제국주의자 중 한 사람이다.


사실 보츠와나는 1885년 이후 영국 보호령 이었으나 그 동안은 다른 유럽의 침략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고 여겨 별로 싫은 기색이 없었다. 영국 또한 이들을 본격적인 식민지로 해 보았자 얻는 것이 없다고 생각해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1889년 세실로즈가 식민지 팽창을 시작하자 사정이 달라졌다. 보츠와나 추장들은 자기 땅이 세실로즈 손에 떨어지면 수탈과 재앙의 연속일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무력으로는 이길 수 없지만, 어떤 식으로든지 맞설 각오는 되어 있었다. 추장들은 덜 나쁜 쪽을 택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로즈의 밥이 되느니 영국의 통치를 강화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해 영국 빅토리아 여왕과 당시 식민장관 쳄버린을 찾은 것이다. 


이들은 런던 선교회의 주선으로 런던에 갈 수 있었다. 운도 좋았다. 쳄버린은 이들의 고충에 공감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철도를 건설키로 했다. 11월 6일 추장과 쳄버린은 통역을 통해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쳄버린: 추장들은 땅에 대해 이야기하고, 우리가 준수할 법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지도를 봅시다. 우리는 철도에 사용할 토지만 갖고, 그 이상은 손 대지 않겠습니다.


추장: 우리는 수상이 땅을 차지한다면 개의치 않을 것입니다.


쳄버린: 내가 파견하는 이들은 꼭 필요한 땅만 차지할 것이며, 그에 상응하는 보상도 하겠습니다.


추장; 우리는 이 일에 공정하게 대해줄 것이라 믿습니다.


쳄버린; 여러분의 뜻을 존중해 드릴 것입니다.

 


당시 보츠와나는 영국의 마그나칼타와 유사한 정치제도를 갖고 있었다. 크그틀라라는 부족협의회가 있어, 집단의사 결정 제도를 통해 부족의 모든 정책을 다루었다. 회의에서는 세금, 법령 등을 다루며, 부족 원의 불만을 토론할 기회도 있고, 추장의 바램이 기각되기도 했다. 


추장자리도 세습이 아니라, 재능과 능력을 증명한 자라면 누구라도 차지할 수 있었다. 이곳에는 "왕은 인민의 축복으로 왕이 된다"는 속담이 있는데, 그대로 지켜졌다.


오늘날 보츠와나는 아프리카에서 국민소득이 가장 높은 나라가 됐다. 2017년 기준 1만6,000달러로, 옆 나라 콩고의 500달러와는 비교할 수 없이 높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을까?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