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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왜 실패하는가(10)-일본의 행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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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일본에서 풍신수길의 뒤를 이은 덕천가강의 250년 세월은 대체로 평화로웠다. 1853년 미국 페리함대가 동경만에 나타나 개항을 요구한다. 청 나라가 영국의 원정대에게 굴욕을 당했다는 소식도 이미 들었고, 미 함대가 두 차례(1846, 1849) 일에 접근해 통상을 요구한 바도 있었고, 더욱이 페리 제독은 이번에 쉽게 물러서지 않으리란 자세여서, 막부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심정이었다.


미국은 남북전쟁을 마치고 제국주의 후발 주자로서, 중국에 지출하고 싶었다. 아직은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항해술에 이르지 못해, 중국을 향하는 항로는 미 서부-캐나다 연안-베링해-일본-중국에 이르는 연안항로를 택하고 있어, 중국에 가는 도중에 연료공급이나 조난 시 구조를 위해 일본과 외교를 터야 하는 입장이었다.


페리함대의 일 방문도, 미 동부-대서양 횡단-아프리카 남단-인도양-싱가포르-중국-일본에 이르는 8개월의 긴 항해여서 항해거리를 반 이상 줄일 수 있는 태평양 항로의 개척이 필요했다.


 일본은 ‘중요한 일이니 1년간 생각할 시간을 달라’하여 페리가 순순히 철수했고, 약속대로 다음해에 다시 온 페리와 개항을 합의한다(미일 수호조약). 그리고 잘 알려진 대로 유신을 단행해 아시아에서 최초로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다.


그러나 한 나라가 수세기 유지해온 체제를 바꾸는 일이 결코 쉬운 일(조선은 실패함)이 아닌데, 일은 어떻게 극복하고 근대화에 성공했는지, 또 국가 사에는 행운도 따라야 하는데, 어떤 행운이 있었는지 알아보자.


 
본론


1)일의 산업 혁명


현재의 동경이 위치한 간도평야는 덕천가강이 처음 자리를 잡을 당시(1590)에는 늪 지대로 둘러싸인 조그만 어촌이었다. 풍신수길의 입장에서는 그의 정치적 라이벌인 덕천을 막부의 본거지인 교도에서 멀리 늪지대로 쫓아낸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정비, 개간하고 나니, 간도평야는 비옥한 곡창 지대가 되었다. 70% 이상이 산지인 일에서 이는 예기치 않은 덕천의 행운이었다. 한국의 강원도 만한 간도평야는 당시 조선 전체의 쌀 생산량에 버금가는 수확을 안겨 주었다. 일본 내 힘의 균형이 덕천에 기울어져 천하를 통일하고 쇼군이 된다(1603).


그리고 덕천은 국내 안정을 위해, 250여 모든 번주를 격년제로 동경에 거주시키고, 가족 일부를 동경에 상주시켜, 혹시 있을 반란을 예방했다. 가족을 인질로 잡아놓은 격이었다. 더하여, 먼 길을 오가는 번주가 자기 통치 지역을 떠나있어, 모반을 도모할 틈을 주지 않고자 함이었다.


그리하여, 일 서남단 규수 지방의 번주는 4000리를 여행하여 동경에 도착, 1년 간 하릴없이 동경성 근처에서 소일하다 가곤 하였다. 이 참근교대는 경비가 많이 드는 일이어서 번의 재정에 부담이 됐다. 당연히 돈이 없으면 모반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당시 동경은 인구 100만의 대도시가 되어(조선 한양은 20만), 이들 도시 소비생활을 뒷받침하는 각종 생필품, 사치품이 전국에서 공급되어야 했다. 이로 인해 경제발전을 자극, 일본 내 초기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페리가 일을 방문할 당시, 일은 유럽의 산업혁명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이를 수용할 수 있는 전 단계의 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전통적인 작은 작업장, 또는 기술자의 집에서 가족노동으로 도기, 칠기 같은 것을 만들어내는 수준이었다.


2)사무라이의 역경


풍신 이후 일은 매우 엄격한 계급사회였는데, 상업에 종사하여 국민 생활을 이롭게는 하나 직접 생산하는 것은 없으면서 이득을 취하는 상인을 최하급으로, 물건을 만들어 국민생활을 돕는 공인을 그 위에, 국민을 먹여 살리는 농민을 그 위에, 그리고 자신의 이득 취함이 없이 이들을 다스리는 사족(무사)을 최상위에 놓아 사, 농, 공, 상 신분 이동을 금지하고 세습했다.


4계급 중 무사만이 칼을 차고 다닐 수 있었으며, 상급무사가 지날 때는 하급무사나 평민은 길을 비켜 엎드려 절을 하였고, 무례한 평민의 목을 벨 수도 있었다. 한편, 평민이 노름을 하다가 적발되면 가벼이 처벌 했으나, 무사는 같은 경우 품위를 손상시켰다 하여 엄히 다스렸다.


그리고 농민이 내는 세금으로 무사는 봉급을 받고, 전시에는 군인으로, 평시에는 번 내 행정관리로서 일을 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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