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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왜 실패하는가(7)-청의 해체 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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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중국의 당나라(618-907)는 지구의 반대쪽에 로마라는 나라가 있는 줄은 알고 있었다. 서와 동은 서로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고 송, 명, 청 시대에 이르렀고, 명 시대(1368-1644)부터 포르투갈, 네덜란드 상선이 연안에 출몰, 소규모의 물물거래가 이뤄진다.


이러던 중 서와 동의 만남은 유감스럽게도 잔인하게 변화되었다. 영국이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과잉 생산되고 있던 면직물의 해외시장을 찾게 됐고, 이것이 열병같이 약탈적 제국주의로 이어진다.


먼저, 청은 건국 후 백여 년의 평온한 세월을 보냈으나, 그 후 국가 운영에 실패하여 각종 사회적 모순과 갈등이 누적, 국가 해체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했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영이 접근한다.


당시 청은 16, 17세기, 대외적으로는 조선, 오키나와, 월남, 버마, 타이왕조와 종속의 관계를 맺고, 종주국으로 군림하며 대제국으로 품위를 지키며,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러한 청이 어찌하여 실패한 국가로 되어 가는지, 비극과 희극 같은 과정을 들여다본다.


 본론


청 제국을 밑바닥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은, 인구의 90% 이상을 점하고 있는 소작농 이었다. 그들은 지주의 땅을 경작하고 50% 정도의 지대를 지주에 납부하고, 지주는 토지세를 정부에 지불했다.


 이들 소작농은 십여 호 내지 수십 호로 이루어진 자연촌락에서 그런대로 조용한 농촌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외부와 교류가 필요 없는 자급자족 경제였다.


농민을 지배하는 관료는 중앙에서 파견되었지만 그들은 임기가 끝나면 떠남으로 인해 자연히 현지와 연결이 약했고, 그런 관계로 향신이라 불리는 지주출신(대개 과거 급제자) 지방 세도가가 징세, 재판 등 농민의 일상을 지배했다. 


농민들은 농한기에는 가내수공업이나, 행상 등 다양한 부업을 영위해 지대나 토지세를 겨우 내며 생활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농촌사회에 18세기 들어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우선, 인구가 증가 하였다(1749년 1억8천만. 1833년 4억).


이로 인해 좁은 경작지에서 기존의 농업, 부업으로는 먹고 살 수가 없어 이농 인구가 증가하고, 지방도시가 생기고, 이곳을 중심으로 소규모 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초기 단계이나 산업이 생겨나자 화폐유통이 늘고 전당포, 고리대금 같은 사유금융이 나타나는 등, 오랜 세월 이어왔던 사회구조가 바뀌기 시작했다. 흔히 변화는 혼란을 수반하는데 청의 구제도는 이를 수용할 수가 없었다.


이런 과정에서 새로이 나타난 부자들이 불우한 농민들이 내놓은 경작지를 사들이기 시작, 경작지는 돈을 가진 부류에게 집결되기 시작했다. 또한 지주와 소농민간의 신분 예속관계가 느슨해져, 점차 그들간에 대립이 증가되면서 특히 흉작 시기에 지대감면요구 등으로 갈등이 증폭됐다.


정부는 국가재정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토지세를 어떻게든 거두어야 했기에 소농민의 저항을 탄압하여 주었다. 이틈에 악덕 지주는 자의적으로 높은 지대를 징수(농민빈곤화)하는 등 청 말기 착취적 제도가 고착화 되어갔다.


또 이들은 지방 세력가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가족으로부터 과거급제 자를 배출하려 어려운 한문 공부에 매진했고, 여의치 못하면 정부에 돈을 주고 벼슬을 샀다.


청 말기엔 지배세력의 착취가 한층 심해, 살 길을 찾아 농지를 떠나는 농민이 증가했다. 이들은 도시 빈민 또는 불법집단에 모여들었다. 이런 여러 불법집단의 발흥은 청 왕조의 평화와 안정의 시대가 끝나고 국가 해체가 시작됐다는 예보였다.


언제나 기회를 노리고, 약점 이용에 빈틈없는 영이 압력을 시작, 내우외환을 겪는다. 영은 청으로부터 차, 비단을 수입하고 면직물을 팔았는데, 차 마시는 습관이 보편화 되면서 수입은 증가일로이나 면직물은 전연 팔리지 않아 영의 적자가 누적되었다(당시 청은 각 가정마다 옷감 짜는 틀이 있어, 옷감을 자급자족했다).


영은 이를 해결코자 인도의 아편을 청에 밀수출했다. 청은 침체된 사회분위기 속에 아편 소모가 급격히 증가, 정부에서 금지령을 내렸으나 효과가 없었다. 부패한 관료가 밀수를 눈감아주고, 뇌물을 수수했고, 그렇다고 처벌받는 관료도 없었다.


아편을 둘러싸고, 수입자유화를 요구하는 영과 이를 반대하는 청이 대결하니 이것이 아편전쟁인데 청은 패한다. 이후 청은 고달픈 해체의 길을 걷는다. 


 결론


아편전쟁은 조선의 헌종 때이다. 조선 또한 비슷한 길을 걷는데, 왕조의 실정으로 일어난 임오군란, 동학란을 스스로 해결치 못해, 이틈에 개입한 청과 일이 한반도에서 대결한다.
이렇게 해서 조선 또한 해체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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