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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키산맥에서의 백팩킹(backpacking)
Imsoonsook

 

 일 년에 한 차례씩 원정 산행을 해오고 있다. 굳이 여행의 목적을 든다면 에너지 충전 혹은 일상의 여백을 위한 행보라고 하겠지만 실은 대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고생은 시작된다. 그러면서도 때가 되면 마음부터 앞서는 건 그 속에서 캐내는 크고 작은 보석 때문이리라. 큰 감동, 긴 여운으로 남아있는 로키에서의 백 팩킹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내 안에서 여전히 그 빛을 발하고 있다. 

 

 

 


 로키에서는 어디를 가나 쉬운 곳이 없었다. 배낭이 무거운 날은 무게에 눌려 힘들었고 가벼운 날은 할 일을 다 못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는 떠나기 아쉬워 가슴이 저렸고 산새가 험난한 곳은 스스로 포기하게 될까 두려웠다. 억겁의 세월을 품은 대자연 앞에서 나란 존재는 늘 미미했고 켜켜이 앉은 세속의 때는 숱한 들꽃 앞에서조차 움츠려 들게 했다. 


 일행은 십여 일간 로키에 산재한 트레일들을 하이킹 한 다음 캐나다 로키의 최고봉인 롭슨 산(Mt. Robson, 해발 3964m) 주변을 탐색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며칠 유숙했던 지인의 편안한 카티지에서 배낭 속의 모든 걸 쏟아놓고 야영에 필요한 장비며 생필품을 선별하다 보니 비로소 백 팩킹이라는 무게가 피부에 와 닿았다. 
 

묵직한 배낭을 메고 롭슨 강을 건너자 빗방울이 후드득 흩뿌리기 시작했다. 아득히 보이는 설산도 침울한 분위기에 쌓여 긴장되었으나 이내 비구름이 걷히고 우리의 입산을 환영하듯 오후의 햇살에 반짝였다. 

 

 

 


 산 그림자가 드리운 키니 호수(Kinney lake) 베이스캠프에서 1박을 한 다음 일행은 서둘러 목적지인 버그 레이크 캠핑장으로 향했다. 오륙십 대의 일행 여섯 명은 약간의 고산증과 배낭의 무게로 인해 얼굴이 좀 푸석해 보였을 뿐 컨디션은 좋았다.


 산을 오르는 동안 빙하수가 쏟아져 내리는 폭포며 수시수시 나타나는 야생동물들 그리고 산재한 만년설을 만날 때마다 일행은 할 말을 잊고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인간의 표현 한계를 넘어버린 대자연의 경이로움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넋을 놓고 하염없이 그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해가 서산에 기울 때쯤 버그 레이크 캠핑장에 도착했다. 롭슨산 정상으로부터 쏟아져 내려 호수와 맞닿아 있는 빙하를 보는 순간 이틀 동안의 사투는 사라지고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눈물이 자꾸 치밀어 올라왔다. 이런 장관을 보기 위해 유럽인들은 백 팩킹 대신 헬리콥터를 이용하여 산맥을 넘는다는데 그 감동의 깊이가 얼마나 다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몸과 마음이 함께 카타르시스를 경험한 그날 밤, 나는 자주 텐트 밖으로 뛰쳐나왔다. 천 년의 소리를 한데 모은 듯 요란한 굉음을 내며 호수로 떨어져 내리는 낙빙을 보기 위해서, 아우라를 거느린 보름달이 빙하를 마주하고 있는 장관에 홀려서 잠을 잘 수 없었다. 설산과 빙하, 보름달과 호수, 이들은 함께 또는 따로 객의 텐트를 자주 들었다 놓곤 했다.


 다음날 K대장의 선도로 대장정에 나섰다. 주변의 빙하와 폭포를 탐사할 수 있도록 코스를 만들어 놓은 스노버드 트레일(Snowbird trail)을 따라 걸으며 면면을 살펴보다가 마지막으로 콜리맨 빙하(Coleman glacier)를 돌아오는 왕복 20km의 산행이었다. 


 고산지대라 볼거리는 크게 없어도 잔잔한 들꽃이며 이끼류에 관심을 쏟다가 그것들마저 끊어지고 험한 바위산 산행이 이어지자 일행은 급격한 체력 저하를 보였다. 이를 눈치 챈 K대장은 하산하는 사람들에게 자주 ‘저 앞 돌산 넘어 무엇이 있더냐’고 물었으나 한결같이 별 것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반환점에 뭐가 있건 없건 그렇다고 중도에 포기할 우리들이 아니었다. 이미 로키의 속살을 깊숙이 경험한 터라 더 놀랄 일이 무엇 있겠는가라는 초연함도 함께 했다.


 고산증과 허기짐, 그리고 체력의 한계를 가까스로 견디며 목적지에 도달했다. 예상대로 며칠째 계속 보아왔던 태초의 파란 하늘과 드넓은 설원에 거친 바람이 한몫을 더했다. 하지만 왠지 거기가 끝이 아닐 것 같은 강한 의구심에 지친 다리를 끌며 눈밭을 조금 더 헤쳐 나갔다. 


 인생은 반전의 묘미에 더 살맛이 나는지 모른다. 해발 삼천 미터가 넘는 산봉오리들이 코발트 빛 빙원에 잠겨있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둘, 셋 짝을 이룬 섬들이 바다에 둥둥 떠 있는 모습과 흡사했다. 쩍쩍 갈라진 틈 사이로 옥색의 하늘이 스며 있었고 깊이 들어가다 보면 바다와 하늘이 맞닿을 것만 같았다. 


 엄청난 크기의 빙원을 위에서 아래로 굽어본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우리는 모두 아, 아 하고 탄성만 지를 뿐 선 자리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 그곳은 무관심 속에서 비롯된 걸작 빙원인 셈이었다. 


 Reef iced field라고 명명된 빙원은 BC주와 앨버타주 경계에 자리한 관계로 두 주가 관할구역을 서로 미루는 바람에 제대로 된 대접을 못 받는 처지였다. 지도는 물론 트레일 안내판에도 올라있지 않으니 대부분의 등산가들은 직전에서 놓치고 만다. 방문자가 적으니 훼손도 덜 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찐득한 끈기 끝에 찾아낸 그곳은 우리들의 뇌리 깊숙이 박혀있는 영롱한 보석이다. 모든 관계에서 적당한 무관심은 서로를 건강하게 하는 방편임을 자연에서 터득하였다고나 할까. 


 사람들은 흔히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버킷리스트 1순위에 로키산맥을 거론한다. 나도 한 치의 주저함 없이 거기에 공감한다. 하지만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서 로키의 진면목을 조금이나마 더 보고 느낄 수 있는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치열하면 할수록 찐하게 다가오는 로키의 매력을 감히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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