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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창섭 시평]세족식을 위하여-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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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족식을 위하여

    -정호승

 

 

사랑을 위하여 사랑을 가르치지 마라
세족식을 위하여 우리가
세상의 더러운 물 속에 발을 담글지라도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 마라

 

지상의 모든 먼지와 때와
고통의 모든 눈물과 흔적을 위하여
오늘 내 이웃의 발을 씻기고 또 씻길지라도
사랑을 위하여 이제는
사랑의 형식을 가르치지 마라

 

사랑은 이미 가르침이 아니다
가르치는 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밤마다 발을 씻지 않고는 잠들지 못하는
우리의 사랑은 언제나
거짓 앞에 서 있다

 

가르치지 마라 부활절을 위하여
가르치지 마라 세족식을 위하여
사랑을 가르치는 시대는 슬프고
사랑을 가르칠 수 있다고 믿는
믿음의 시대는 슬프다

 

 

정호승 

 

 

 

부활절을 위하여


 스무 줄로 된 이 시는 사랑이라는 말이 열번이나 반복됩니다. “사랑”! 하도 많이 듣고 말하고 노래까지 불러대, 이젠 그 의미와 감정마저 희미해 지고, 닳을대로 닳아버려 천하게까지 들리는 말, 사랑! 그 사랑에 대해 시인은 생각합니다. 이 시대의 사랑법에 대해 시인은 말합니다.


 ‘세족’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힘겹고 고단한 삶에 지치고 더러워진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고 어루만져 주는 사랑! 아, 그것이 성자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내 발은 세상의 더러운 물 속에 담가놓고 이웃의 발을 씻긴다고 성자의 사랑을 실천했노라 말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 말라는 말입니다. 거룩한 사랑을 위하여 천한 사랑을 가르치지 말라는 말입니다.


 ‘사랑은 이미 가르침이 아니다/ 가르치는 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사랑을 가르치는 시대는 슬프고/ 사랑을 가르칠 수 있다고 믿는/ 믿음의 시대는 슬프다’ 라고 시인은 사랑의 형식만을 가르치는 이 시대, 이 믿음의 시대의 위선을 비판합니다.


 그는 그의 또 다른 시 <서울의 예수>에서 “인간이 아름다와 하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는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 라고 예수의 사랑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매주마다 모여 사랑을 가르치는 것을 봅니다. 지금 예수는 사랑을 가르치는 그 불켜진 방을 들여다 보며, 붉은 벽돌벽에 기대어 울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밤마다 발을 씻지 않고는 잠들지 못하는 너희들의 사랑은 거짓 앞에 서 있느니라.’ 사랑을 가르치기 전에 네 발부터 씻을 지어다.


 사족으로,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교회에서 아이들은 알룩달룩 예쁘게 달걀에 색깔을 입힙니다. ‘부활절과 달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물고기나 새들은 알에서 부화되어 다시 태어납니다. 사람도 어떤 깨달음이나 사랑에 의해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부활의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다면 지나친 말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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