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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예찬-노(老) 철학자의 산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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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연희동 자택 인근 동산을 산책하다 잠시 쉬는 김형석 교수

 


 
 인생은 끝이 안 보이는 머나먼 길이며 그 길을 따라 한발 두발 걸어가는 것이 삶의 과정이 아닌가 한다. 걷다 보면 평탄한 길도 있고 험한 길도 만난다. 길가에 핀 들꽃이 있고 파란 하늘과 싱그런 바람도 만나겠지만 먹구름 끼고 비나 눈이 내리는 궂은 날도 있을 것이다. 목적지를 정해놓고 걷는 사람도 있을테지만 그런 목적 없이 그저 길이 있으니 걷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길을 걷되 혼자 걷는 사람도 있을테고 둘 혹은 셋 이상 여럿이 함께 걷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사회학 교수 다비드 르 브르통(David Le Breton)이 2002년에 지은 산문집 <걷기 예찬>(원제: Eloge de la Marche)은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스테디 셀러로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걷기는 육체적 건강 뿐만 아니라 사색과 명상을 위해 매우 유용한 운동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 책에서 걷기를 하되 가능한 혼자서 걸으라고 충고한다. “혼자서 걷는 것은 명상, 자연스러움, 소요(逍遙)의 모색이다. 옆에 동반자가 있으면 이런 덕목이 훼손되고,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며, 의사소통의 의무를 지게 된다.”고 말한다. 


 호젓한 숲길을 산책할 때 옆에 누가 있다면 깊이있는 사색이 어려울 것이다. 동반자와 대화를 전혀 하지 않을 수는 없고, 얘기를 하다 보면 자연히 생각에 잠기거나 주변 풍경을 즐길 여유도 반감된다. 걷기는 역시 혼자 해야 참된 의미가 있을 터이다. 여행도 마찬가지. 브르통은 “여행은 혼자서 하는 게 좋다. 둘이 여행을 하게 되면 동일한 경험을 나누어 갖기 위하여 자신의 어느 한 몫을 포기하게 된다”고 했다.


 철학자 루소는 자기만의 고독을 너무도 소중히 여겼다. 그래서 이런 말을 남겼다. “누가 나에게 마차의 빈 자리를 권하거나 길을 가던 사람이 내게 가까이 올 때면 나는 걸으면서 이룩해온 큰 재산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만 같아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인생은 근본적으로 혼자서 먼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옆에 동행자가 있으면 외롭진 않을테지만 되레 부담이 될 때가 적지 않다. 


0…최근 KBS 1의 <인간극장> 프로그램에서 인상깊은 철학자를 만났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웬만한 한국인 치고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인사이지만, 나는 세상에 유명한 사람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번에 우연히 이 프로를 보고 고개가 숙여지는 대목이 많았다.      


 ‘한국 철학의 대부’ ‘시대의 스승’ 등 여러 존칭으로 불리는 김 교수는 1920년 생이니 만으로는 99세(백수.白壽)이지만 한국나이로는 100세가 된다. (백수를 흔히 100세로 생각하나 백수 글자를 보면 일백 백(百)이 아니라 흰 백(白)자를 쓰며 이는 일백 백에서 하나(一)를 뺀 모양이다. 즉, 백수는 100에서 하나가 모자라는 99세를 가리킨다). 이 분은 많은 저서와 강연, 언론 대담 등을 통해 잘 알려져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더 세상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것은 완숙한 철학적 사유(思惟)에 더해 연세가 들어도 변함없는 육체적 정신적 건강과 그에 따른 왕성한 활동 때문이리라. 


 100세 철학자의 일과는 시계처럼 규칙적이다. 아침 6시에 일어나 밤 11시에 잠자리에 든다. 하루 한 시간쯤 산책을 하고 강의나 집필원고를 정리한다. 일주일에 세 번은 혼자 버스를 타고 수영장에 간다. 하루에도 몇 번씩 2층집 층계를 오르내린다. 틀니나 보청기도 의지 않는다.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 가끔 지팡이는 짚는다. 1년에 160번씩 강의를 다닌다. 지방에서 강연요청이 와도 사양하지 않는다. 


 김 교수는 행복한 사람이다. 70대 아들과 딸, 사위들이 모두 정년퇴직을 했는데 100세인 그만 일하고 있다. 세속적 관점에서 보면 질투(?)도 난다. 보통사람들은 60세 전후로 현직에서 떠나 무슨 일을 할지 몰라 방황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얼굴이 항상 웃는다. 식사 전엔 “여러 사람에게 좋은 얘기를 들려줄 수 있도록 나에게 건강을 허락해달라”고 기도한다.  

 
 나는 특히 이 프로를 보면서, 15년 전 부인을 잃고 홀로 고독하게 사는 이 분의 사상이 산책과 걷기, 명상을 통해 더욱 깊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봤다. 김 교수는 바닷가를 산책하며 “대학교수를 정년 퇴임하고 바깥 사회로 나온 후 한 15년 동안이 제일 좋았던 것 같다. 내 나이로 보면 60세에서 80세까지가 제일 좋았다”고 회고한다. 


0…바야흐로 100세 시대다. 그런데 우리는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이 행복인가 라는 질문 앞에 선뜻 답을 내놓지 못한다. 나는 김 교수가 인생에서 가장 좋았었다는 나이인데 과연 행복을 느끼며 살고 있는가. 


 김 교수는 말한다. “인생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힘든 과정이었지만, 사랑이 있는 고생이 행복이었다. 그것을 깨닫는데 90년이 걸렸다”. 베레모를 쓴 노 철학자가 하얀 눈이 덮힌 산책로를 걸어가는 모습이 내 가슴에 오래 남아 있다.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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