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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ho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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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음악가 시리즈(II)-‘바람의 신부’(Bride of the Wind)(4)
youngho2017

 
구스타프 말러와 그의 아내 
알마의 생애를 그린 작품 

 

 

 

 

(지난 호에 이어)
 아무튼 실망과 상처만 남긴 사랑이었지만 코코슈카는 오랫동안 알마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1918년 알마와 실물 크기의 인형을 뮌헨의 헤르미네 모스 인형제작사에 주문 제작하여 파리의 유명 디자이너에게 드레스를 맞춰 입히고, 마차나 산책길, 레스토랑 심지어 오페라 공연 때도 대동하며 늘 침대에 두고 같이 지낸 얘기는 유명하다.

 


 그러나 1919년 드레스덴의 미술학교 교수로 임명을 받고 축하 파티를 하던 코코슈카는 포도주 병을 휘둘러 알마의 분신과도 같은 인형의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이 일로 머리 잘린 시체가 있다는 주민의 신고를 받고 경찰까지 출동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열렬히 사랑했기에 알마를 잊는 데도 그만큼이나 격렬한 과정이 필요했나 보다. 


 오스카르 코코슈카에 관한 영화 밖 이야기: 그는 1930년 나치 정권에 의해 '퇴폐 미술가'로 낙인 찍혀 독일의 공공박물관에 소장된 417점의 그림을 모두 몰수 당하는 수난을 겪는다. 그 속에는 대표작 '바람의 신부'도 포함되어 있었다. 1934년 프라하로 이주하여 공개적으로 파시즘과 나치 정권에 저항하다 1938년 영국으로 건너가 1946년 영국시민권을 획득한다. 그 후 스위스 제네바 호숫가의 몽트뢰(Montreux)에서 여생을 보내다 1980년에 94세로 사망했다.


 한편 알마는 1915년 8월18일에 베를린에서 발터 그로피우스와 재혼하여 알마 쉰들러-말러-그로피우스로 이름이 길어진다. 그 다음해 10월5일 딸 마농 그로피우스(Alma Manon Gropius, 1916~1935)가 태어난다. 이를 축하하기 위해 그로피우스는 에드바르 뭉크의 그림 '해변가의 여름 밤(Summer Night on the Beach)'을 알마에게 선물한다. [註: 이 그림은 알마가 미국으로 이민 간 다음해인 1940년 4월에 의붓아버지 카를 몰이 오스트리아 벨베데레 박물관에 팔아버렸다. 알마는 1947년에 본인의 동의 없이 팔았다고 비엔나 법정에 반환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했다. 이유는 그녀 소유의 제메링(Semmering) 집수리 경비를 조달하기 위한 조치였지 몰의 사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 명화를 선뜻 국외로 내줄 리가 있겠는가. 아무튼 뜻을 이루지 못하자 알마는 그 후 다시는 오스트리아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그러나 그로피우스의 영혼과 알마의 육체를 빼닮은 마농은 '천사'로 불리는 뮤즈로 자라나지만 꽃다운 나이 19살 때 소아마비로 사망한다. 

 

 

 

 


 오스트리아 작곡가인 알반 베르크(Alban Berg, 1885~1935) 부부는 아이가 없어 평소 마농을 친딸처럼 귀여워했는데, 이미 작곡하고 있던 '바이올린 협주곡'을 '천사를 추모하며(To the memory of an Angel)'라고 붙여 헌정했다. 신학교수이며 사제로 알마와 관계를 가졌던 요하네스 홀른슈타이너(Johannes Hollnsteiner, 1895~1971)가 추도사를 했다.


 마농은 구스타프 말러가 묻힌 그린칭 공동묘지에 묻혔다. 이 때도 알마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알반 베르크는 마농이 죽은 후 8개월 지난 12월에 독충에 물려 50세로 사망했다. 마농의 이복자매인 안나 말러가 그녀의 무덤에 모래시계를 들고 있는 소녀상을 건립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중 공습으로 파괴되고 1950년대에 발터 그로피우스가 디자인 한 삼각형의 평면돌 비석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다시 '바람의 신부'로 돌아가자. 1917년 11월14일 베를린 임페리얼 호텔. 알마의 살롱 멤버인 엘리트 지식인 그룹이 다 모였다. 거기서 알마는 전장에서 부상 당한 프란츠 베르펠(Franz Werfel, 1890~1945)을 만난다. 그의 시가 좋아 곡을 붙여 'Der Erkennende (The Recognition)'을 발표한 바 있는 알마는 처음 만난 그가 키가 작고 입술이 두텁고 뚱뚱한 유태인이라는 사실에 맘이 내키지 않았지만 그로피우스와는 달리 음악에 조예가 깊고 창조적인 문학적 아이디어에 점점 반하게 된다.


 11살 연하의 베르펠(그레고를 세버그)이 주세페 베르디는 열정과 감정이 풍부하고 열성이 있는 반면 리하르트 바그너는 차갑고 감정 표현이 없으며 추상적이라고 평하며, 자기는 열정과 사랑과 황홀감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이에 알마가 감격해 하자 보란 듯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베르펠. 클림트, 그로피우스, 폰 쳄린스키 등 명사들이 일제히 그에게 시선이 집중되고 알마의 이 모습을 지켜본 그로피우스가 자리를 뜬다. 


 발터 그로피우스에 관한 영화 밖 이야기: 그는 1920년 10월11일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결국 알마와 정식 이혼하고, 1934년에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가 1937~1952년 동안 하버드 대학에서 건축학 교수를 역임하다 1969년 보스톤에서 86세로 사망했다.

 

 

 


 이제 베르펠에 푹 빠진 알마가 그와 외도를 하여 1918년에 사내아이 마르틴을 생산했으나 조숙아로 10개월 뒤에 수두증으로 사망한다. 이런 엄마의 애정 행각을 처음부터 끝까지 옆에서 지켜보는 딸 안나 말러. 

 

 

 


 알마는 베르펠에게 코코슈카 및 그로피우스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완벽함 때문에 사람을 지겹게 한 것이 문제였지만 말러는 아직도 내 삶의 일부"라고 강조한다. 이에 베르펠이 "알마의 연인들 모두 말러의 무덤에 꽃을 심어야겠다"고 익살스럽게 화답한다. 


 베르펠이 알마가 만든 곡을 피아노로 연주하며 작곡을 멈추지 말고 계속하라고 격려한다. 알마가 말러가 지적했던 것처럼 "복잡하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훌륭하다"며 "당신처럼 열정이 있고, 매력적이며 흥분시킨다"고 진심으로 말한다. 

 

 

 


 1919년 비엔나의 브람스홀에서 알마 작곡 발표회를 개최한다. 베르펠을 만남으로서 자신의 예술가로서의 재능을 인정받게 된 알마의 행복감은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다. 이 영화에 알마 작곡의 가곡 '내 아버지의 정원에서(In meines Vaters Garten)'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난 평안해요(Bei dir ist es traut)'를 들려주고, 마지막 장면에 미국 소프라노 오페라 가수인 르네 플레밍(58)이 'Laue Sommernacht (Mild Summer Night, in the Sky)'를 부른다. 관중들의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에 관중석에서 일어나 화답하는 알마. 

 

 

 


 노래가 나오는 동안 여러 인물들에 대한 뒷얘기를 자막으로 올리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이 영화의 음악감독은 영국 작곡가•지휘자인 스티븐 엔델만(55)이 맡았고,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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