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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kang39
캐나다 加人 강신봉
전 캐나다한인총연합회장, 전 토론토한인회장, 요크한국인학교 설립교장, 김치캐나다사장, 전 스코필드박사동상건립위원장,전 무궁화사랑모임창립회장, 토론토흥사단창립지부장, 대한민국국민훈장목련장, 역사문화원장

캐나다 문협회원.현 GTA한카노인대학장
http://skang3441.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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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 오늘 방문자 수: 66 전체: 255,978 )
‘설마’의 역사 500년(10)-효종의 북벌웅지(北伐雄志)
samkang39

 

 1637년 정축년, 병자호란 후에 16대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그리고 빈궁들이 모두 볼모로 청나라 심양으로 잡혀갔다가 8년간 외롭고 쓰라린 포로생활을 마치고 조국에 돌아왔다. 청나라의 3대 임금 세조의 특별한 배려를 받고 풀려난 것이다.


 청나라의 문화와 천주교 사상과 많은 문물을 가지고 들어 온 소현세자였지만, 청나라를 천시하고 배척하는 생각으로 골이 깊히 패인 친명파 사대주의자들에게서 소현세자는 미움을 샀고 아버지인 인조에게 마저도 비위를 건드려 불효의 자식으로 점이 찍혔다. 


청나라의 문물이 어떻고, 천주교가 어떻고 떠들어 대는 소현의 꼴이 미워서 아버지가 홧김에 아들에게 집어 던진 벼룻돌이 그만 소현의 얼굴을 정통으로 때려서 어이없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 괴이한 일이 벌어졌다. 그 벼룻돌은 청나라의 세조가 소현세자에게 하사한 선물이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렇게 사건이 급변함에 따라 차남으로 형과 같이 청나라에 다녀온 봉림대군이 1649년, 임금이 되니 그가 17대 효종이다. 그는 소현세자와는 달리 병자호란 때에 심양으로 잡혀가서 8년간 받은 고초를 뼛속으로 새기고 있었기에 임금이 된 후에 강력한 북벌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웅지를 품게 되었다. 


효종은 청나라에 머무르면서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서쪽으로는 몽고, 남쪽으로는 산해관 등지에서 전쟁터를 따라 다니며 명나라가 패망하는 것을 직접 체험하였고, 동쪽으로는 철령위, 개원위 등으로 끌려 다니며 온갖 고초를 다 겪었기 때문에 청나라에 대해 많은 원한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집권 초기부터 배청 분위기를 확산시키며 송시열의 북벌론에 근거하여 북벌작전계획을 추진하였다.


 “힘이 없어서 우리가 당하고 있다”는 기본적 국방철학을 통치의 그 첫번째 이념으로 내세웠다. 이는 우리 조선이 개국한 이래 처음으로, 지역토벌이 아닌 청나라를 쳐부수겠다는, 북벌의 의지를 확고히 하는 정책임으로 자못 그 의의가 크다고 생각지 않을 수 없다. 항상 사대주의 사상으로 형제의 맹약이 아니면 군신의 맹약으로 수모를 받아 왔지만 효종은 이를 쳐부수겠다는 전략을 세워 나가고 있었으니 이는 이씨조선 500년 역대에 중대한 국방의 전기를 마련한 것이라고 평가 된다. 비록 그의 조기 사망으로 그 뜻이 제대로 성취되지는 못하였지만 그만한 웅지를 품었다는 것 자체가 전례 없던 일이기 때문이다. 


 효종은 친청파인 김자점 등 일당을 모두 파직하고 송시열 등 대청 강경파를 중용하여 은밀히 북벌계획을 수립하였다. 무장 이완 등을 중용하고 어영청을 대폭 강화하였으며 네델랜드에서 표류해 온 하멜 등을 훈련도감에 수용하여 신무기를 개량보수케 하였다. 


한편, 김육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충청 전라도의 연안 고을에 대동법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한편 군량미를 비축하게 하였다. 효종이 봉림대군 시절, 팔년 동안 울분속에서 지내다가 심양을 떠나오면서 지은 시 한 수를 소개한다. 이 시를 보면 그가 얼마나 이를 갈며 북벌의 꿈을 꾸었는지 짐작할 수가 있다. 

 


 어찌하면 날랜 군사 십만명을 얻어서/ 추풍에 구련성을 깨뜨려 부수고,
 크게 부르짖어 오랑캐를 짓밟곤/ 노래하고 춤추며 백옥경에 돌아 올고.

 


 효종이 북벌의 웅지를 품고 국력을 기울여 그 준비를 서두를 때에 효종을 도와서 그 웅장한 뜻을 받아 주동이 된 두 신하는 전술한 대로 문인으로서는 송시열이요, 무신으로는 이완 장군이었다. 


그 중에도 이완은 아주 용맹스러운 장수로서, 만약에 효종이 일직 붕어(임금이 세상을 떠남)하지 않았던들 고구려의 옛날 판도를 뛰어 넘어서 청나라의 서울까지 처들어 갔을 사람이다. 이완 장군은 어려서부터 힘이 장사였고, 또 담력이 태산과 같은 인물이었다. 


 여기에서 이완 장군의 한 에피소들를 소개한다. 아직 나이가 채 이십이 못되었을 때였다. 그가 어머니를 따라 시골 외갓집에 갔을 때의 일이다. 야밤에 잠을 자다가 뒤를 보고 싶어 집안에서 좀 떨어진 뒷간을 찾아가니, 그 외가의 개가 따라 와서는 뒷간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데 별안간 어데선가 호랑이가 나타나서 그 개를 물었다. 


호랑이에게 물려 가는 개의 울부짖는 소리는 너무도 요란하였다. 이 소리에 온 집안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밖으로 뛰어 나왔는데, 뒷간에 앉아 있던 이완이는 아주 태연자약하게 바지춤을 바로 잡으며 서서히 뒷간 밖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호랑이에게 이완까지 해를 입은 줄로만 알았던 외가의 식구들은 우선 이완이가 무사함을 다행이 여기며 어찌된 일이냐고 묻는 것이었다. 


“호랑이가 어찌 하드냐?” “어찌하긴 뭘 어찌합니까? 호랑이가 개를 물어간 것이죠” “그래 호랑이가 개를 물어 갔는데 너는 어이 그리 태연하단 말이냐?” “범이 개를 물고 나를 쳐다 보드라고요. 그래서 댑다 큰 기침을 한 번 하였죠. 내 기침소리에 겁을 먹고 호랑이가 달아났어요.” 


그의 의연한 처사에 온 식구들이 감탄치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장군다운 기질을 타고났던 사람이다.


 효종은 삼전도의 치욕과 청국에서의 볼모생활을 평생동안 되새기며 북벌정책에 집념하여 군비확충에 전력을 쏟은 군주였으나, 국제정세가 호전되지 않았고, 계속적인 흉년으로 인하여 이를 뒷바침할 재정이 부족하였으며, 때로는 북벌정책보다는 현실적인 경제 재건을 주장하는 조신들과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31세에 등극한 효종은 10년 재위기간 북벌의 그 웅지를 이루지 못하고 1659년 한 참 일할 수 있는 41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하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확립한 군사력은 조선사회의 안정을 위한 굳건한 기반이 되었기에 이후 약 2백년 동안 북방의 침입을 예방할 수 있었다. 인조의 병자호란에서 청나라와 군신의 맹약을 하였지만 이후에는 실로 그러한 수모가 계속되지 아니하였던 것도 이러한 북벌사상의 깊이가 음으로 양으로 작용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설마 그렇게 될 것이야 하고 항상 방심하기만 하고 당파싸움에만 신경을 곤두 세우던 우리의 고질적 사고 개념속에서 효종의 확고한 북벌웅지와 대처방안은, 우리 나라의 지난 500년 국방역사관 속에서 평가해 볼 때에, 박정희 대통령의 월남파병과 ‘유비무환’ 정책 다음으로 높히 평가되어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실로 이 두 사람은 그들의 젊었던 시절, 전쟁을 통한 고초와 해외에서의 경험과 힘없는 국가로서의 슬픔을, 모두 몸소 체험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병자호란을 겪으며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봉림대군, 8년간의 인질생활 속에서 그는 힘있는 청나라의 거만하고 용맹스러운 모습을 직접 체험하였으며, 힘없는 주변 국가와 민족들의 비애를 확실하게 몸소 경험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왜정시대에 태어나서 일본교육을 받고 만주의 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중국에 파견되었다. 그는 일본과 중국이라는 두 큰 나라 사이에서 힘이 없이 쓰러진 조선민족의 존재를 깨달았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이 패망하고 다시금 대한민국이 국권을 찾았을 때에 그는 자원하여 대한민국의 국군 장교가 되었다. 6.25전쟁을 치르고 4.19혁명을 바라 보았지만 확실한 국가발전의 모습이 보이지 않음을 개탄하고 그는 5.16군사혁명을 일으켰다.


 이후 그는 크게 두 가지 업적을 성취하였다. 첫째는 반공이념을 내세워, 국민을 튼튼하게 정신무장 시킴으로 ‘유비무환’의 국방정신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둘째는 연차적 경제개발을 추진하여 최빈국 대한민국을 중진국 대열에 올려 놓음으로, 오늘날 세계무역 10대 강국이 되는 원동력의 초석을 마련한 것이다. 


그러한 국방력과 그러한 경제개발이 아니었던들 오늘의 대한민국은 라오스 캄보디아나 남미의 칠레 아르헨티나에도 미치지 못하는 나라로 침체되어 있었을 것이다. 


 우리 나라와 같이 강국들의 틈에 끼여 있는 약소국에게는 강력한 국방정책만이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다. 자유와 평화 그리고 민주주의 이론보다 ‘유비무환’의 강력한 국방정책이 반드시 앞서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민족의 생존철학으로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나무에 오르면 뿌리가 있음을 생각하고, 물을 마시면 새암이 있음을 생각하라”는 귀한 말씀이 있다. 오늘의 후예들이여! 우리가 서 있는 이 땅,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경제적 만족의 뿌리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가를 생각하라. 


우리 역사의 뿌리와 샘물의 근원을 잊는 날 우리는 또 다른 설마 설마로 안이한 생각에 빠질 것이고, 비극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지난 날의 역사는 미래를 비추는 등불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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