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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토론토대학교 정신의학 박사,
경북대 교육학과 교수(정년퇴임)
한국상담학회 수련감독 전문 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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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으로 성서(聖書)를 읽다(47)-“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28)
kimbokyung

 

 (지난 호에 이어)
즉 집을 떠난 탕자와 같은 허망한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 아버지의 숨으로 생명을 얻게 된 인간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나라 안에서 자유자재 하는 유일한 방법은 허망한 생각을 일으켜 자신 스스로 자신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는데 있다. 


기독교에서의 ‘거듭 남’이란 회개를 의미한다. 아담의 망심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인간에게의 회개란 무엇인가? 그것은 선에서도 그렇게 보지만 탐진치를 계정혜로 대치하려고 하는 의식적 노력이나 애씀으로는 부족하다. 탐진치라는 관념이나 계정혜라는 관념조차 자신의 마음에서 없어지지 않는 한 아담의 본심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어린아이처럼 탐진치라는 의식분별도 없이 탐진치가 없고, 계정혜라는 의식분별도 없이 계정혜를 자신의 본질로 나타나게 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반야의 지혜이며 무념의 지혜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포도나무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나 바울 사도가 성도를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는 지체”라고 하는 뜻에는 공의 지혜, 무념의 지혜가 그 안에 내포되어 있다. 성도가 속한 교회나 개인이 속한 사회 그리고 인간이 속한 자연과 우주를 우리의 몸과 같은 유기체로 보게 되면 인간의 본질은 공이 아닐 수 없고, 인간의 본질이 공이므로 그 안에서 자유자재 할 수 있게 됨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된다. 


25.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달마도(達磨圖)에는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는 글이 보통 부제로 들어가 있다.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란 말의 뜻은 인간은 누구나 본래 부처이므로 부처를 자신 밖에서 따로 찾지 말고, 달마의 벽관(壁觀)이 예시하고 있는 것과 같이 자신의 마음을 바로 봄으로서 견성하고 성불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불교의 경전이나 기독교의 성서를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으로,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으로, 불교에서는 인간은 누구나 본래불(本來佛)이라 하고, 기독교에서는 인간은 누구나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또한 그의 숨으로 생명을 얻게 된,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 좋았던” 존재라는 점에서 보면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란 기독교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수행법이 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양자 간의 수행 목적이 선악이나 성범이나 미추와 같은, 분별심을 제거함으로써 그 이면의 밝고 지혜로운 본심을 회복하게 하는데 공통점이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본심은 망심에 의하여 가려지거나 방해를 받을 수는 있지만, 구름 위에 해가 빛나고 있는 것과 같이, 본래 그대로의 모습으로 항상 밝은 빛을 발하고 있다. 해를 가리고 있던 구름만 물러가면 해는 그대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본심을 회복하는 방법이란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기만 하면 된다. 그것은 곧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나름으로 어떤 생각도 일으키지 않고 본래의 그 모습 그대로의 가지로 포도나무둥치에 붙어있기만 하면 된다. 이를 불교에서는 분별심에 상대되는 것으로, 평상심(平常心)이라고 부른다. 


평상심이란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젖을 빨다가 잠을 자는 것과 같은 편안하고 자유로운 마음이다. 아담과 이브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따먹고 눈이 밝아져 부끄러워하고 또한 두려워하게 된 마음이나 에덴에서 쫓겨나 괴로움 속에서 살게 된 마음을 분별심이라고 한다면,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기 전의 에덴에서 자유로웠던 마음을 평상심이라고 할 것이다. 


평상심이란 개인적으로 잘 먹고, 잘 산다는 것만은 아니다. 평상심이란 개개인이 한 몸에 속한 오장육부가 각기 다른 모양과 성질에 따라 온전한 형태로 각기 최대의 기능을 발휘함으로써 몸 전체가 정상(正常)을 유지할 수 있게 됨과 같은 것이다. 


개체는 전체 안에서, 전체는 개체 안에서 조화와 평화를 이루게 된다. 개인 자신이 유기체인 것처럼 개인이 속한 사회나 나라나 자연 우주가 무진장의 일즉다 다즉일의 유기체의 형태를 띠고 있다. 거기에 무슨 계급이나 불평등이니 미추니 성범이니 귀천이니 하는 분별이 들어가 서로 다투거나 미워하거나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할 것이 없다.


건강한 교회라면, 건강한 사회라면, 그래서 그 교회, 그 사회가 건강하고 평화롭고 행복한 교회가 되고 사회가 되자면, 한 몸에 속한 지체들 간에 선악이라는 관념이 없는 것과 같이 교회나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 간에 각기 자신이 가진 위치나 책임이나 기능이 다르다고 해도 그 사이에 분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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