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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토론토대학교 정신의학 박사,
경북대 교육학과 교수(정년퇴임)
한국상담학회 수련감독 전문 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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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으로 성서(聖書)를 읽다(43)-“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24)
kimbokyung


23. 참선(參禪) 


달마의 벽관에 비교되는 것으로 선수행에는 한 생각도 일으키게 하지 않도록 하는 참선이라는 것이 있다. 참선이란 옛 조사(祖師)들의 언행에서 따온 화두(話頭)를 참구하는 것으로서,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이 조주 선사를 찾아와 묻기를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하니 선사가 어떤 사람에게는 “없다(無)!”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있다(有)!”고 한 것을 화두로 삼아 왜 어떤 때는 “없다!”고 하기도 하고 왜 어떤 때는 “있다!”고 했는가를 의심하고 또 의심하게 하는 방법으로, 최종적으로는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1700개나 되는 화두가 있다. 스승은 그 많은 화두 중에서 수행자의 성격이나 수행경험 등 근기(根氣)에 따라 그 중 한 가지를 선택하여 주고 그 과정을 감독지도하며 그의 깨달음이 올바른 것인가를 인가(認可)하는 책임을 진다. 


화두 중에는 “부처가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에 “화장실의 휴지!”라고 대답했다든가, “달마가 서쪽에서 온 연유가 무엇입니까?”하고 묻는 질문에 “뜰 앞의 잣나무!”라고 했다든가, 그것과 동일한 질문에 “차 한 잔 들게!”라는 말로 응답한 것 등이 있다. 때론 “부처가 무엇입니까?”라는 제자의 물음에 스승이 고함을 쳤다든가 또는 들고 있던 지팡이로 내려쳤다고 하는 처벌적(?) 언행도 포함된다. 


화두에 포함된 문답은 일반적인 상식이나 지식으로서는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달마가 서쪽에서 온 연유가 무엇입니까?”하는 물음에 “뜰 앞의 잣나무!”라고 대답한 것 등으로 되어 있는 화두는 마치 수수께끼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화두에는 무슨 특별한 비밀이 숨겨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꿀맛이 어떤 것인지 말은 들어왔으나 직접 맛을 본적은 없었던 사람이 꿀맛을 보고 “아- 그 맛이었군!”하는 것과 같다. 


화두를 통해 깨달음을 얻는 데는 세 가지 심리학적 조건이 요구된다. 첫째는 대신심(大信心)으로, 깨달음에 대한 믿음이며, 둘째는 대분심(大噴心)으로, 깨닫고 말겠다는 결단이며, 셋째는 대의심(大疑心)으로, 화두를 놓지 않고 하루 종일 무슨 일에 종사하나 그것이 자신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려 하는가를 계속 자신에 묻는 것이다. 


화두에 등장되는 조사들의 언행은 제자가 질문하면서 속으로 기대했던 응답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조사의 언행을 제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질문에 대한 무시도 되고 처벌도 된다. 이러한 성질의 화두를 대신심과 대분심을 가지고 계속 든다는 것은 수행자 자신에게 고통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수행자는 마치 “밤송이를 통째 삼킨 것”과 같은 갈등과 고통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고통이 계속되면서 어느 날, 어느 순간, 어떤 기연(機緣), 상황을 만나 확연히 깨닫게 된다. 참선을 통한 깨달음의 경지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으로써 아래와 같은 두 가지 사례가 있다. 


몽산 스님은 그날도 “개에게 불성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무!”라고 응답한 조주 선사의 ‘무자(無字)’ 화두를 들고 있는 중에 그가 앉아있는 선방에 들어와 향을 사르다가 향 뚜껑을 잘못 건드려 소리가 났다. 이 소리를 듣는 순간 몽산 스님은 “앗!”하는 외마디 소리를 지름과 함께 깨달음을 얻고 아래와 같은 게송을 지었다고 한다.

 

 

어느덧 갈 길 다 하였네
밟아 뒤집으니 파도가 곧 물이로다 
천하를 뛰어 넘는 늙은 조주여 
그대 면목 다만 이것뿐인가 

 

 

소동파는 오늘도 산천초목이 설법을 한다는 스승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의심하고 또 의심하면서 말을 타고 산길을 가고 있었다. 그가 타고 가던 말이 어느덧 깊은 계곡의 폭포수를 옆에 낀 좁은 샛길을 가고 있었다. 그는 우람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폭포수를 무심히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순간 “앗!”하고 깨달음을 얻고, 눈물을 흘리며 스승이 계시는 곳을 향해 절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었다고 한다. 

 

 

골짜기의 소리가 모두 부처님의 장광설(長廣舌)인데
산의 빛깔은 어찌 청정한 몸이 아니겠는가!
여래의 팔만 사천 가지 이 소리를 
다른 날 어떻게 사람들에게 보일꼬 

 

 

소동파는 그 후 다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었다.

 

 

여산의 비와 안개 절강의 조수
가보기 않았을 땐 한(恨)도 많더니 
가보고 돌아오니 별것 아닐세. 
여산은 비와 안개 절강의 조수 

 

 

위의 사례에서 알게 되는 것은 오직 화두에 집중하여 의심하고 또 의심하고 있는 정신적 상태에서는 마치 달마의 벽관에 있어서 처럼 다른 잡다한 생각이 차단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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