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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경 칼럼

심리학자, 토론토대학교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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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으로 성서(聖書)를 읽다(38)-“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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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호에 이어)
이를 기독교에서 보면 인간의 본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조물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육체, ‘흙덩이’가 조물주의 숨으로 생기를 얻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인간과 창조주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지만물과의 총체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전의 비유, 포도나무의 비유가 그것이다. 불교나 기독교가 누가 천지를 창조했는지 말하고 있거나 말하고 있지 않거나 관계없이, 창조주 자신과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 간의 상호 연관성을 유기체로 비유하고 있다는 공통점에서 보면 불교의 사법인이 기독교 신앙과도 일치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즉 선(禪)에서 인간의 본질을 공이라고 하는 것처럼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본질도 공이다.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는 지체로서의 인간, 성도의 본질이 무아 또는 공이 아닐 수 없다.   공은 자신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지혜를 자신의 지혜로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며 공은 예수님의 몸에 붙은 가지로 예수님의 성품을 자신의 성품으로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그것은 인간에게만 한정된 것만도 아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의 본질 역시 공이다. 공으로 천지만물들은 아름다운 하나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저 산에 부는 바람과 잔잔한 시냇물, 그 소리 가운데 주 음성 들리니, 주 하나님의 큰 뜻을 나 알듯하도다”라고 어떤 옛 서양의 찬송가 작가는 노래한다. 이는 어떤 수행자, 소동파가 “산천초목이 설법(說法)을 한다”는 스승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생각하면서 산길을 가다가 폭포소리에 ‘문득’ 깨닫고 “골짜기의 소리가 모두 부처님의 장광설(長廣舌)인데, 산의 빛깔은 어찌 청정한 몸이 아니겠는가? 여래의 팔만사천가지 이 소리를 다른 날 어떻게 사람들에게 보일꼬!”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인간의 번뇌와 고통은 어디서 오는가? 인간의 번뇌와 고통은 인간이 실제로는 전체와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부분이면서도 자신이 전체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경험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판단하게 되는 망상에서 온다. 신약성서의 핵심이 나무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지면 말라 죽을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하는데 있다. 아담과 이브가 저지른 죄로 정녕 죽게 된 이유 역시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나간 것에 있다. 


그때로부터 모든 것은 달라졌다. 태초에는 사자도 풀을 먹었으므로 어떤 상함과 죽음도 없었던 하나님의 나라에 자타나 내외나 선악이라는 경계가 생기고 해함과 죽음이라는 고통이 생기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이 서로 의존하게 되어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이 변함으로써 자연의 질서까지도 변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 보게 되는 혼돈된 사회며 고통의 사회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으로부터 쫓겨나 만나게 되는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덮여있어서 노동의 고통 없이는 먹을 수 없게 되었으며, 여자는 산통을 피하지 못하게 되었고 또한 이브에게 선악과를 따먹게 한 뱀은 여자와 서로 원수가 되었다. 


선에서 인간의 지식이나 논리를 불성(佛性) 또는 공의 지혜를 방해하는 훼방꾼으로 보는 것처럼 기독교에서도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을 인간의 고통과 죽음의 원인으로 보고 있다.


인간이 고통과 죽음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자신을 전체로부터 스스로 분리시키는 망심으로부터, 자신을 전체에 속한 부분으로 통합하게 하는 본심, 무아로 돌아오게 하는데 있다. 


그것이 율법을 완성하는 방법으로서 자신을 하나님이 거하는 성전이 되게 하는 것이고, 이웃을 자기의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게 하는 방법으로 번뇌로부터 벗어나고 또한 이 땅에서 영생을 누리며 사는 방법이 된다.


그러나 그것을 단지 사람이 지식으로 안다고 하여 성전이 되고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가 될 수는 없다. 사성제 중 도성제(道聖諦)가 의미하는 것처럼,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본래의 그 모습, 그리고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로서의 본래 그 모습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생각도 없어져야 한다. 


‘자기 몸이 곧 성전’이라고 생각하거나 또는 자신을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한, 자기가 성전이 될 수도 없고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도 될 수 없다. 


즉 자신이 성전이요, 가지라는 관념까지도 없어져야 진실한 성전이 되고 또한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가 될 수 있다. 또한 그것이 영인 하나님을 영으로 섬기고, 이웃을 그리스도의 몸 그리고 자신의 몸에 붙은 지체로 사랑할 수 있게 되는 유일한 방법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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