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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oonja
한순자

경기도 여주 출생,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기도 광수중학교 근무, 1992년 캐나다 이민, 캐나다문인협회 수필 부문 입상, 2006년 해외동포문학상, 작품집 <인생에 실패는 없다 다만 또 다른 삶이 있을 뿐이다>, <나이만큼 행복한 여자>, <밀리언 달러 티켓 나도 한장>,<행복이라는 이름의 여행>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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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았던 눈물(상)
hansoonja

 

 

 남편이 갑자기 사망을 하고 보니, 사람이 이렇게 쉽게도 ‘숨을 거둘 수’가 있는 것인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다음 순간 ‘슬프다’는 생각보다는 가게 문을 닫을 수도 없는데 어떻게 하지 그것이 우선 무겁게 다가왔다.


 남편을 땅에 묻고 오던 날도 가게 문을 열었다. 장례를 치르고 식구들과 식사를 하고는 난 가게로 나갔다. 하루 쉬라는 딸들의 권유에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내 현실을 빨리, 바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도 그래야만 했다. 


장례를 치르고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4살배기 손녀가 “할머니 저희 집으로 가자”고 하는 것이었다. 4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애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나 하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신기하고 고맙기도 했다. 옆에 앉아 있던 큰 딸이 “엄마, 혼자 집으로 갈 수 있겠어, 저희 집으로 가요”라고 했다.


하지만 난 그리 되면 우선 내 잠자리가 불편하기도 했다. 남편과 같이 살던, 남편이 침대에 누워 있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생생해서 조금은 섬뜩하기도, 무서운 마음이 없지도 않았지만 내가 빨리 적응을 해야 했다. 


 내가 남편을 따라 죽을 수도, 이 현실을 회피할 수도 없는데, 잠시 모면하고자 딸네 집으로 간다면 내 마음이 그만큼 더 힘들어질 것 같았다. 남편을 졸지에 보내고, 내가 우선해야 할 것은, ‘집과 가게’에서 내 ‘마음이 뜨지’ 않도록 그 마음을 바로 다스리고 잡아 나가는 것이 중요했다. 


 그랬기에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가게에 나가서 몇 시간 일을 하는 동안에도 가급적이면 남편이 사망했다는 것은 물론이요, 남편 생각조차도 잠시 뒤로 미루고 싶었다. 그래서 손님들에게도 남편의 사망을 얘기하지 않았고, 딸들에게도 혹시 누가 물으면 한국에 나갔다고 둘러대라고 했다. 


그러니 일을 하는 동안 울 수도, 눈을 붉혀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무리 그렇게 마음을 다잡는다 해도 순간순간 눈가에 내비치는 눈물까지야 어찌 막을 수 있었을까. 힘겹게 몇 시간 일을 하고 가게 문을 닫았다.


 드디어 차에 올라타면서, ‘이제 나 울어도 될까? 아니, 엉엉 목 놓아 울어볼까’ 했다. 한 번 앓지도 않던 사람이 불과 며칠 사이에 갑자기 사망을 하고, 남편과 나는 헬퍼 한 번을 쓰지 않고, 아니 못하고 ‘생계’를 유지해 왔는데, 이제 온전히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몫, 짐이네 싶으니 눈물을 흘리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정신을 차려 지금 처해진 현실을 살아내야 했다. 그런 무게 감이 우선 다가왔기에 슬퍼할 겨를도 없어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난 남편을 그렇게 보내고 이젠 남편과 같이 키웠던 개 세 마리와 어디든 ‘거취’를 옮겨야 했다. 나 혼자가 아닌 달린 식솔(견공 3)들이 있으니 어디로 가야 할지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집 문제는 좀 미룬다 해도, 가게를 나 혼자 꾸려갈 수가 없으니, 그 다음날부터 작은 사위가 가게 문을 열고, 큰 딸이 4살배기를 학교에 보내면서 학교가 끝이 나고 데이케어에 다닐 수 있게 조치를 취하고, 주로 오전 11시부터 내가 가게에 나가는 4, 5시까지 가게를 봐줬다. 평소에 난 도매상을 다니기는 했지만 돈 관리는 남편이 했었기에 그런 부분도 우선 큰 딸이 도맡아 했다. 


 가게 문을 닫을 수도 없어 장사는 하고 있지만 내가 가장 두려웠던 것은, 이 가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나까지 졸지에 무슨 일을 당한다면, 아니, 난 당장 내일 죽는다 해도 아무런 아쉬움도 미련도 없을 것 같은데, 나까지 남편처럼 가버리면 그 짐을 자식들에게 떠넘겨준다 싶으니 그것이 더 무섭고 두려웠다.


 가게가 잘 되어 사람이라도 쓰고, 마켓에 내놓을 수 있는 정도라면 뭘 또 그렇게 고민을 하겠나. 몇 년 사이에 매상은 더 떨어져 팔려고 선뜻 내놓을 수도 없고, 리스 계약 기간이 있으니 문을 닫을 수도 없는데, 이런 일까지 아이들에게 짐을 지운다는 생각만 하면 눈물이 아니라 걱정부터 앞섰다. 


 그래도 든든한 딸, 사위가 하던 일을 미뤄가며 ‘엄마 구하기, 가게 매상 올리기’ 작전에 들어갔다. 우선 매상부터 끌어올려야 한다며 담배를 2팩 스페샬, 2리터 드링크도 주말이면 2병에 4불 가격으로 팔며, 딸과 사위는 세일하는 품목은 알아서 잘들 사들이며 물건도 떨어지지 않게 신경을 썼다. 


 무엇보다 큰 딸에게 고마운 것은 엄마인 내가 신경 쓰지 않게 가게 일을 하면서도, 몸도 쉴 수 있게 내가 일하는 시간을 최대한 줄여주려 애쓰는 모습이 미안하고 참 고마웠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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