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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oonja
한순자

경기도 여주 출생,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기도 광수중학교 근무, 1992년 캐나다 이민, 캐나다문인협회 수필 부문 입상, 2006년 해외동포문학상, 작품집 <인생에 실패는 없다 다만 또 다른 삶이 있을 뿐이다>, <나이만큼 행복한 여자>, <밀리언 달러 티켓 나도 한장>,<행복이라는 이름의 여행>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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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남자(6)
hansoonja

 

 (지난 호에 이어)
 며칠 지나고 나니 큰아이가 얘기 좀 하자며 마주 앉았다. 그 다음날로 나가라고 할 때엔 나보고 죽으러 가라는 말이냐며 지금은 가지 않을 것이라고 단호히 얘기했었다.  


 며칠 쉬고 나니 아빠 혼자 거리 귀신 만들 것이냐며 6월 초에 다시 나가라며 울먹이며 얘기하는 것이었다.

아이의 그런 마음이나 표정을 보니 자식이 좋기는 좋구나, 핏줄은 무서운 것인가 보다며 가슴이 뭉클했다.


 엄마가 나가서 너무 힘이 들어 견딜 수 없으면 다시 들어오더라도 일단은 나가서 정 안되겠다 싶으면 아빠를 모시고 그냥 들어오라는 것이다. 


 캐나다를 떠나기 하루 이틀 전 친정 올케가 서울에 다시 나올 것이냐며 전화를 했다. 그래서 그렇다고 했더니 또 고모부와 부딪치며 어떻게 하려고 나오느냐고 하기에 아이들이 간곡히 원하기도 하지만 죽기 아니면 살기 아니겠느냐며 통화를 간단히 하고 끊었다. 


 친정 올케와 전화를 끝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전화를 했다. 남편 얘기로는 친정 올케가 전화를 해서 고모가 서울을 나오면 어디 가서 있을 것이냐며 이제 우리 집엔 고3도 있고 하니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얘기를 하더란다. 남편은 그 전화를 받고 너무도 울화가 치밀어 술을 몇 잔 먹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넘어져서 얼굴과 손등을 다쳤다고 얘기하는 것이었다. 


 난 순간 이럴 수가 있나. 이번엔 나가면 친정집엔 가지도 않으려고 했는데 그동안 애쓰고 수고한 것을 그 말 한마디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상처로 남겨 놓고 말겠구나 싶어 가슴 저미는 아픔과, 나는 그렇다 해도 그런 대접밖에 받지 못하는 남편이 더 할 수 없이 측은하고 불쌍해서 망연히 앉아 있었다. 


 큰 아이는 아무 걱정 말고 이번엔 나가면 방부터 하나 얻어 아빠한테 잡수실 거라도 제대로 해드리라며 앞으로는 외갓집 식구들은 보지 않을 것이라고 이를 앙 다무는 것이었다.

 

 다시 서울행 비행기를 타다.


 그래서 6월 7일 날 거의 열흘 만에 서울로 다시 나가게 되었다. 공항엔 남편이 나와 있었다. 이번엔 웬일로 청바지에 남방차림이어서 오히려 그런 모습이 보기 좋았다. 오른 쪽 눈썹 위엔 바셀린을 번들번들하게 바르고, 오른손 손등도 많이 까져 있었다. 


 아무리 미우네 고우네 해도 내 남편이요, 아이들의 아빠인 그가 저토록 마음고생, 남들이 옆에 올까 겁이 나는 사람이 되었나 싶어 가슴이 찌르르 아파왔다. 


 공항에서 곧 바로 친구네 집으로 가고 싶다고 하니 오늘만은 같이 있고 싶다고 하기에 어디 아침을 먹을 만한 곳을 찾으니 이른 시간이어서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하고 그나마도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비행기는 새벽 여섯시에 도착하는 것이어서 짐을 찾아 나온다고 해도 아침 8시전이니 그런 시간엔 음식점에 가서 먹을 만한 곳이 없었다. 그 날 밤도 다시 우리 내외는 갈 곳을 정하지 못하고 몇 번 찾아갔던 모텔로 짐 가방을 끌고 찾아 들었다. 


 딸아이는 아빠한테 밥이라도 따뜻하게 해 드리라고 하지만, 어디 손잡고 들어가서 밥이라도 끓일 수 있는 방 한 칸이 있어야 가능한 얘기가 아니더냐고 기가 막히고 비참해서 주저앉고 싶었다. 


 못난 사람, 어찌 그렇게 못났느냐고 마구 퍼부어 대고 싶었다. 크고 좋은 차, 넓은 평수가 뭐 그리 대단하며, 무엇이든 순서가 있고, 때가 있고, 분수가 있는 것이지, 하루아침에 배가 부를 것이며, 천리길을 100걸음, 200걸음 먼저 갈 수가 있더냐고 따져주고 싶었다. 


 그 밤, 그 다음 아침도 해결할 수 없는,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을 놓고 다시 또 대화도 되지 않는 언쟁을 벌이다가 휑하니 먼저 나가 버리고 말았다. 그 좁고 낯선, 창문도 열 수 없는 모텔 방에서 하루를 지낼 일도 끔찍했고, 커다란 이민 가방을 들고 어디 나설 수도 없었다.


 궁리 끝에, 어차피 남편은 저녁에 숙소를 찾아야하니 그리로 오면 되겠지 싶어 모텔 사무실에 가서 얘기를 했다. 짐을 좀 맡아 줄 수가 있겠느냐고 하니 문단속을 잘하고 가라기에 가방을 넣어둔 채 방문을 잠그고 명함 한 장을 받아들고 그곳을 나왔다. 


 난 친구네로 가서 그 밤을 그곳에서 자기로 하고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가방을 그곳에 두고 나왔다고 하니 순순히 가방을 맡아 주더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했더니 알았다고 하기에 어디서 잘 것이냐고 묻지 않았다. 으레 가방이 있는 그 곳으로 가서 잠을 자겠지 했기에.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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