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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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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기적-말고의 잘린 귀를 고치시다
daekim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 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쭈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 지라.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왔느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눅 22:47-53)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사복음서는 그 쓰여진 시기가 조금씩 다르다. 어디에 중점을 두어 예수님의 삶을 묘사했는가도 일치하지 않는다. 마태는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라는데 초점을 맞추었고, 마가는 섬기는 자로서의 예수님을 그렸으며, 누가는 인간 예수님을 염두에 두고 그의 복음서를 기술했다. 이에 반해 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는데 목적을 두었다.


따라서 사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행적들은 정확하게 일치하지도 않으며, 어떤 복음서에는 있으나 다른 복음서에는 아예 없는 것들도 있다. 하지만 예수께서 잡히시는 장면은 오병이어의 기적과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복음서 마다 모두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예수님의 생애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이 사건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일어났다.


겟세마네 동산은 예루살렘 근처의 감람산에 있는 동산으로서 예수께서 자주 가셔서 기도하던 곳이었다. 예수님은 나귀등에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참으로 많은 일을 하시며 바쁜 나날을 보내셨다. 하나님의 집인 성전이 장사치들에 의해 장터로 변한 것에 분노하여 그들을 내쫓으셨으며, 그에게 오는 많은 병자들도 고쳐주셨다. 아울러 포도원 농부의 비유(마 21:33-46), 혼인잔치 비유(마 22:1-14)를 비롯한 여러 비유들을 통해 종교지도자들의 무능함과 나태함과 완악함과 그들의 죄악 된 생활을 지적하시며 회개를 촉구함과 동시에 하늘나라의 진리를 가르치셨다. 


이 기간 동안 예수께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여”로 시작하여 그들의 의를 가장한 위선의 생활을 지적하며 신랄하게 책망하신 것은(마 23:1-39) 그들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온갖 거짓된 행실을 일삼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경고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끝까지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본분을 다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더불어 마지막으로 만찬을 가지신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 믿는 자의 세계에선 “섬기는 자가”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몸소 보여주셨으며(요 13:14),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신다(요 13:34).


그런 후 그가 떠난다는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말씀하시며 그가 떠나면 성령께서 오셔서 그들의 인도자와 보호자가 되어주실 것을 일러주신 후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신다. 이름을 밝히시지는 않았지만 제자들 중 누군가가 그를 배반할 것이라 말씀하신 것도 이때였다.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마치시고 예수께서 향하신 곳이 겟세마네 동산이었다. 예수님은 베드로, 요한, 야고보만을 데리고 동산 안으로 들어가시며 나머지 제자들은 동산입구에서 기다리게 하셨다. 그러나 함께 들어간 세 제자들마저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고난의 잔을 할 수 있으면 피하게 해달라고 땀방울이 피처럼 되어 흘러내리도록 간절하게 기도하시는 동안 깨어있지 못하고 잠들어 예수님을 더욱 슬프고 고독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란 승리의 기도를 하실 수 있었다. 이 기도를 마치셨을 때 유다를 앞장세운 대제사장들과 그들의 부하들이 등불과 횃불을 밝혀 들고 칼과 몽둥이로 무장하고 동산 안으로 몰려왔다. 


4월 중순인 유월절에는 보름달이 떠있어서 동산 안은 대낮 같이 밝았는데도 그들이 횃불과 등불을 들고 온 것은 숲 속이나 구석진 곳에 숨어있을 예수님을 찾아내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그들이 무기를 들고 있었던 것은 예수께서 순순히 체포 당하지 않으시고 반항을 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는 고난의 잔을 마시기로 결단하고 계셨기에 기세 등등한 그들에게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다. 


그런 예수님을 향해 유다는 “선생님, 안녕하십니까?”라 인사하며 다가가서 입을 맞춘다. 그 당시 제자가 존경하는 스승에게 하던 외적인 표현이 입을 맞추는 것이었다. 유다는 가증스럽게도 사랑과 존경의 상징인 입맞춤을 예수님을 배반하는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런 유다를 바라보며 예수님은 “네가 입맞춤으로 나를 배반하느냐?”물으신다. 


그러자 함께 있던 제자들이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라 물었고, 그들 중 하나가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그의 오른쪽 귀를 잘라버렸다. 이 사건은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지만 칼을 사용한 제자가 베드로이며, 귀가 잘린 대제사장 종의 이름이 말고라는 사실은 누가복음에만 나타나있다. 


베드로가 내려친 칼에 말고의 귀가 떨어져 나가자 예수님은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라. 아버지가 내게 주신 고난의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요 18:11)라 말씀하신다. 이 부분이 공관복음에는 조금씩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마태는 “네 칼을 다시 칼집에 꽂아라. 칼을 쓰는 자는 다 칼로 망한다.”라 기록했고, 누가는 “이것까지 참으라.” 하신 후 말고의 귀를 낫게 하셨다고 말해준다. 하지만 예수께서 칼을 휘두른 베드로를 책망하셨다는 점에 있어서는 사복음서의 기록이 일치한다. 베드로가 한 일은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한 충정의 발로였지만 그것은 예수께서 원하신 바가 아니었다. 


베드로를 나무라신 후 “너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열두 군단도 넘는 천사들을 보내주실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한 성경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 26:53)라 하신 말씀은 예수님의 사명은 무력으로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주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을 통해서도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인류의 죄 값을 지불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그를 구하려 한 베드로를 꾸짖으신 후 예수님은 말고의 귀를 제자리에 붙여주신다. 이 사실을 짧고 간단하게 기록한 제자는 의사인 누가뿐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행하신 다른 기적들과 비교할 수도 없어 보이는 이 기적이 지니고 있는 의미는 크기만 하다. 무엇보다 말고의 귀를 고쳐주심으로 예수님은 그가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의 친구시며, 길 잃고 험한 산골짜기를 방황하는 양 한 마리를 찾아 다니시는 선한 목자이심을 보여주셨다. 


대제사장의 집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는 몰라도 말고는 그 집의 종에 불과했다. 주인의 명령대로 행동하다 그의 말 한마디면 언제라도 죽어야 하는 물건과도 같은 존재가 그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말고가 귀를 잃고 흐르는 피를 손으로 막으며 신음하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그에게 다가가신 것이다. 그리고 자비로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시며 땅에 떨어진 그의 귀를 집어 붙여주신 것이다. 종의 신분이었던 말고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으로 대해주신 것이다.


사람들은 말할지 모른다. 잃었던 귀를 되찾은 말고는 그의 상전인 대제사장 집으로 돌아가 주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위선과 불의를 떡 먹듯이 행하며 사는 주인을 섬기며 살았을 것이라고. 그 주장을 반박할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인간 취급조차 받지 못하던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이름이 영원한 생명의 말씀의 기록인 성경에 들어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말고가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와 권능의 손에 의해 몸과 마음이 새로워진 후 인간이 마땅히 걸어야 할 새로운 인생길을 걸었기 때문이란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결코 잘못된 판단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모두는 말고와 같은 처지가 아닌가 여겨진다. 온갖 사유로 인해 상처받고, 믿었던 사람들에게서 배반당하고, 사랑하는 이에게 버림받아 세상에서 홀로된 외로움과 슬픔과 아픔 속에서 진통하며 지내는 것이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아 홀로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피 흘리며 고통 당하는 말고의 떨어져나간 귀를 고쳐주시던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우리 곁에 계실 뿐만 아니라 사랑과 자비가 가득한 눈빛으로 우리를 쳐다보시며 “네 아픔과 슬픔이 무엇이냐? 네가 절망과 낙망의 수렁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까닭이 무엇이냐?”고 묻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께서 내미시는 손을 잡고, 그의 품에 안기어 우리의 문제를 아뢰면 우리에겐 새로운 인생의 장이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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